갈레 씨, 홀로 죽다
조르주 심농 | 열린책들
문학적 여운
정교하게 만든 미스터리다. 중간에 총알이 발사되고 누가 쏘았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에 정신이 없는 중에 반전으로 사건을 풀어버린다. 힌트는 앞에 즐비하게 있지만 구체적인 사연을 알기 전까지는 알아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대개들 끝까지 헤매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추리소설들이 다 그렇듯, 트릭의 비밀을 알고나면 허탈할 것이다. 홈즈 시리즈의 '토르 교 사건'과 같은 수법이다. 심농이 이를 참고해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이 다섯 번째 읽는 거라서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재미는 덜했지만, 독자를 당황하게 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는 솜씨는 잘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 불쌍한 갈레 씨. 지지리도 복이 없었던 인생.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추리소설에서 범죄 수수께끼 게임보다는 범죄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분위기, 인상, 그리고 인생살이에 치중한다. 실제로 인상적으로 남는 것은 범죄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라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 했던 갈레 씨의 사연이다. 소설 끝 부분은 손수건 한 장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지경이다.
"다만, 그의 오른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여전히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래 평화였어! 그가 기다렸던 것은 바로 그거였다고!" 252쪽
단순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문학적 여운을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매그레 시리즈 총 19권에서 나는 이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를 최고로 꼽는다. 가장 쓴 맛이 나는 소설이다.
추리물을 넘어 문학으로
시리즈 1권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실망한 탓에 기대를 안 하면서 읽었다. 후반부로 가도 뭐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다 바로 다음 문장을 만나고 조르주 심농을 문학 천재로 불러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다만, 그의 오른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여전히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234, 235, 243, 252쪽
이 문장을 무려 네 번 반복한다. 첫번째는 사건을 목격한 생틸레르의 진술로 나오고, 두번째는 사건을 풀어내는 수사반장 매그레의 회상으로 또 나오며, 세번째는 사건을 풀어서 말하는 매그레의 말에서 나오고, 네번째는 사건 종결 후 매그레가 회상하면서 중얼거리며 나온다.
조르주 심농은 그 문장을 네 번 반복하면서 희열을 느꼈으리라. 좋은 이야기를 썼음을 온몸으로 느꼈으리라. 정말 글 잘 쓰는 인간이다.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라.
미스터리도 훌륭하지만 여기에 연민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무려 네 번이나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감동의 망치질을 해대는, 작가의 자신감이라니! 걸작이다.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는 매그레 시리즈가 읽고나면 재미있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오락용 추리소설을 넘어 왜 문학작품인지 보여준다.
추리소설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답을 아는 상태에서는 궁금증이 없기 때문이다. 답을 알면서도 다시 읽는 이유는 바로 그 궁금증을 어떻게 유발시켰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추리소설 작가는 이미 범인과 범행 수법을 확실하게 안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대한 숨기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 절대로 쉽게 알아낼 수 없게 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그렇게 썼을까? 단순히 읽는 재미만을 얻는 독자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한 번 읽고 말지만, 그 이상의 독자나 작가가 되려면 두 번 이상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간 질환이 있는 남자, 에밀 갈레가 죽었다.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 심장이 꿰뚫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해도 말이 되지 않는 단서들만 나열될 뿐이다. 그러다 후반부에 갑자기 매그레가 이 단서들을 이어맞추면서 죽은 갈레 씨의 인생이 드러난다. 기막힌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넘어 인간다움을 담아낸다.
우물 하나와 객실 하나, 그리고 권총. 알고나면 대단한 트릭일 것도 없다.
셜록 홈즈의 '토르 교 사건(The Problem of Thor Bridge)'과 비슷하다. '토르 교 사건'을 읽고 감동한 사람은 없어도 '갈레 씨, 홀로 죽다'를 읽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갈레 씨는 최선을 다해 살고자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했다. 불쌍한 남자. 인생 참 안 풀렸던 그였고 아내고 자식이고 별 다른 사랑조차 받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그들을 위해 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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