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폴리앵에 지다
조르주 심농 | 열린책들

벨기에

벨기에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초콜릿이다. 이러니 외국인이 한국 하면 김치밖에 모른다고 핀잔을 줄 수 없으리라. 벨기에가 세계 지도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유럽 어딘가? 구글 지도 검색해 보니, 네델란드 밑에 독일 왼쪽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 위에 있다. 영국과는 바다 건너 바로다.

영국 하니까 생각났다. 푸아로가 바로 이 나라 출신이다. 그리고 프랑스 작가로 착각하기 쉬운, 쓰는 언어가 불어니까, 조르주 심농이 이 '벨기에' 국적 작가다. 1903년 2월 13일 벨기에 리에주 출생.

생폴리앵은 심농의 고향에 실제로 있는 성당 이름이란다. 구글 지도에 나온다. Église Saint Pholien. 이 단어로 검색해 볼 것.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는 동아리 이야기도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라고. 이야기 자체가 워낙 소설 같아서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인가 싶다. 그렇게 현실과 상상은 겹치고 엎치락뒤치락한다.

매그레 반장은 우연히 만난 사나이의 행동이 수상하고 마침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한 차에 그자를 추적한다. 그러다가 그자가 갖고 다니는 가방과 똑같은 걸 사서 바꿔치기를 한다. 그리고 계속 미행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내는 가방이 바뀐 사실을 알더니, 총으로 자살해 버린다. 이 정도는 황당함의 시작일 뿐이다.

뭔가 대단한 게 가방에 있나 열어 보니 양복 한 벌이 고작이다. 게다가 본인 옷이 아니다. 수사를 의뢰해 보니, 딱히 특별난 옷은 아니다. 다만, 피가 묻어 있단다. 수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루이 죄네라는 이름은 가짜였다.

추적 끝에 벨기에 리에주까지 가게 된 매그레 반장. 가짜 이름의 사내와 뭔가 관련이 있는 듯한 사람들의 모임. 이들은 매그레 반장의 수사를 방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다. 지역 신문사를 돌면서 특정 날짜의 신문을 없애는 남자. 해당 날짜 경찰서 조서들 중 하나마저 뜯어갔는데,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는 것일까? 드디어 찾아내는 그 사건은 생폴리앵 성당 문고리에 목을 맨 사람이 발견된 것인데...

장황한 자백으로 지난 삶을 이야기하는 범인. 이런 식은 아무래도 구식인 듯.

여전히 끝은 씁쓸하다. 매그레 반장은 평소 마시는 맥주 대신에 가짜 압생트를 연거푸 들이킨다.

지난 두 작품(수상한 라트바이인, 갈레 씨 홀로 죽다)과 겹치는 대목이 흥미롭다. 갑작스러운 총격. 술꾼. 본명 대신에 다른 이름을 쓰면서 살아가는 남자. 매그레 반장한테 공소시효 만료를 부르짖는 인간. 협박으로 돈 뜯어내는 빈자. 돈으로 형사를 매수하려는 부자.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 행동 양식, 심리 상태.


매그레 반장의 범죄

소설 첫장 제목이 특이하다. 매그레 반장의 범죄. 영어 번역본은 원제 대신에 이 제목을 택했다.

매그레 수사반장이 범죄를? 뭐지? 매그레는 우연히 수상한 자의 뒤를 좇다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그의 가방을 뒤바꾸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 그는 자살하고 만다.

뭔가 대단한 게 가방에 들었나 싶어 봤더니 고작해야 낡은 양복 한 벌이 나왔다. 그런데 이 옷은 자살한 사람한테는 맞지 않는 옷이다. 게다가 피가 묻어 있다.

이 소설은 소설일 수밖에 없다. 실제 수사반장이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실은 자살 사건을 끝내고 더는 조사하지 않으려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매그레는 끝까지 추적해서, 총 맞아 죽을 뻔 해도,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연속되는 추적과 총격 속에 사건의 진실을 알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나열되는 단서는 추가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기는 더욱 곤란해진다.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이야기에 더욱 몰입시키는, 심농의 솜씨가 일품이다.

매그레는 사건보다 사람에 치중한다. 왜 그가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가 살던 집과 그와 사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간다.

삶은 참 구질구질하다. 그래도 삶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매그레의 시선을 따라 그 인물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담배가 피우고 싶어진다. 마음이 찹찹해진다. 이 소설 마지막에서 매그레 반장은 맥주 대신 연거푸 압생트를 여섯 잔 들이키고 있다. "인생보다 웃기는 게 뭐 있겠나!" 쓴웃음을 삼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26일만 지나면 공소 시효가 지난다며 아내와 자식이 있다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기보다는 연민이었으리라. 내가 저 사람들 입장에 있었다면, 법의 처벌 문제를 떠나서, 나라도 그렇게 했을 법도 싶다. 좋은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가혹하게 애써 체포해서 감옥에 넣어야 정의가 실현되는 건 아니다.

매그레는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고 뻐기는 탐정들과 달리, 이미 다 파악했으나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범죄자들을 풀어주는 편이다. 이게 정말 수사반장이 할 짓인가.

매그레를 읽는 것은 사건 수수께끼 풀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매그레의 연민, 아니 작가 조르주 심농의 연민에 빠지기 위해서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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