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블랙 커피
원작 희곡을 소설로 다시 쓴 찰스 오스본
1928년 발표작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와 1932년 발표작 '엔드하우스의 비극' 사이에 애 여사님은 푸아로가 등장하는 희곡 '블랙 커피(Black Coffee)'을 써서 1929년 말쯤 완성했다. 해당 극은 1930년 초연되었다. 이 희곡이 1931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더욱 놀랍게도, 아직도 이 희곡이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희곡을 찰스 오스본이 크리스티 재단의 동의를 얻어 소설로 다시 써서 1998년 출간했다. 국내에는 희곡으로도 소설로도 번역이 안 되었다. 국내 번역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아무리 뒤져 봐야 이 작품은 찾을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소설만 쓴 게 아니라 각종 대본 작업을 했다. 연극은 물론이고 라디오 텔레비전용 드라마를 위한 글을 쓰셨다. 그러지 않아도 애 여사님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때때로 연극처럼 보인다. 무대 위 인형처럼 움직이는 인물들, 제한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죽음과 불확실성 때문에 공포에 떠는 상황, 살인범은 밝혀지지 않은 채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간다.
소설이 연극적이다. 묘사와 서사의 비중이 적고 대화와 상황 전개가 대부분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이다. 특히 '쥐덫'은 본래 라디오 드라마 극본이었고 이를 소설로 바꾸고 또 다시 연극 대본으로 각색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들리는 소문에는 아직도 이 연극은 영국에서 멈추지 않고 있단다. 2012년에 2만5천 번째 공연을 넘어 버렸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지 못하다. 하지만 애거스 크리스티를 처음 대하는 독자나 기존 소설의 플롯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평가와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애 여사의 작품 중에는 반전과 트릭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탐정의 설명을 다 듣고도 이해가 안 될 때도 종종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장소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집이다. 고립되고 외딴 곳에서 살인이 발생되고 용의자는 한정되어 있다. 혼자 틀어박혀서 과학에만 열중하는 물리학자. 그의 주변 인물들은 불만으로 가득하다. 과학자는 살해되고 원자 폭탄 공식은 사라진다. 범인은 누구인가?
상세하게 얘기하자면, 이 과학자는 자기 주변 인물들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소중한 공식을 훔쳤다고 여기고 이들을 가둔 후에 탐정 푸아로를 오게 해서 범인을 잡도록 하려 한다. 과학자가 살짝 미친 사람이다. "여기는 쥐덫이야.(This place is a rat-trap.)" "쥐잡이가 도착할 거야.(the rat-catcher will arrive.)" 그 직전에 커피잔이 오가고, 그 전에 독약이 오간다.
방 안에 갇힌 사람들. 니들 중에 한 놈이 도둑이라고 말하는 과학자. 불을 끌 테니까 그 사이에 훔쳐간 내 공식 도로 갖다 놔. 정확히 9시에 푸아로가 올 거야. 2분 전이군. 그러니 그 전에 나한테 줘. 여기 테이블 위에 올려 놔. 정확히 1분을 주겠다. 돌려주면 푸아로한테 내가 잘못 알았고 당신은 할 일이 없다고 말할게. 불이 꺼지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불이 켜지고 공식이 담겼다고 얘기한 봉투가 테이블 위에 올려 있다. 이때 활짝 문이 열리고 푸아로와 헤이스팅스 등장.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과학자는 죽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비었다. 누가 훔쳤고 누가 죽였나?
한 사람씩 심문하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사람들의 과거와 정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밝혀진 범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이다.
소설로 읽기보다는 연극으로 보고 싶다.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나쁘지 않다. 괜찮다.
예전 발표작의 트릭이 반복되어 보여서 식상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랑 비슷하다. 커피잔이며 벽난로 위 선반이며. 더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삼간다.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직접 쓴 소설이 아니라서 그런지 문장이 어색하게 읽혔다. 찰스 오스본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쓴 글이니 어쩔 수 없겠다 싶다. 그래도 이야기의 지문은 확실히 애 여사님의 것이다. 푸아로 피날레와 행복 결말. 러브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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