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
2014년 발행
내게는 부러운 사람이 딱 둘 있다. 둘 다 영국인이고 둘 다 유명인이고 둘 다 작가고 둘 다 오래오래 잘 살았고 둘 다 자서전을 썼고 둘 다 자신의 지난 삶을 만족하면서 죽었다. 그 둘은 러셀과 크리스티다.
죽기 전에 자서전에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인생이란 참으로 멋지다.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 볼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마음이 흡족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은 소설보다 재미있다. 지난 시절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글이 짧아서 틈틈이 잠깐씩 읽었다. "지금 추리소설을 써야 '마땅'하지만, 작가란 모름지기 지금 써야 하는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라" 시작부터 이렇게 웃겨 주시는 필력이라니. 그렇게 애 여사는 틈틈이 자서전을 썼다. 1950년 4월 2일 시작해서 1965년 10월 11일에 끝냈다.
여행기, 일상사(집을 얻었네 말았네. 새 차를 샀네 어쩌네. 유모를 구했네 어쩌네. 남편이 이혼하자네 어쩌네. 학교에서 이런저런 수업을 들었네 어쩌네.), 잡담의 혼합이다. 소설 쓰는 것 외에는 대충 빨리 읽었다.
"나는 완전히 아마추어였고 전문적인 작가다운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그저 재미였다." 심지어 직업 표시에 주부라고 써 넣을 정도였다.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부업이었다. 가계에 보탬이 될까 싶어 끄적거리는 거였다, 세상에나. 첫 추리소설의 출판계약을 한 후, 애 여사는 이것으로 책 쓰는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무려 80여 권이 넘는 책을 써내는 데도 말이다. 책을 계속 써낸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집 저택 '애슈필드'를 팔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이런 생각을 스스로 한 것도 아니다. 남편이 책을 더 써서 수입을 크게 올리면 된다고 권유해서였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푸아로 첫 등장 소설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을 마친 후, 그러니까 대략의 구상을 거의 다 마무리한 후에 휴가를 얻어(당시에 약 제조실 소속 간호사였다) 크고 황량하고 숙박객이 거의 없는 호텔에 투숙해서 맹렬하게 글을 써낸다. 혼자서 황무지를 산책하다가 등장인물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연기를 했다고.
377쪽부터 애거서 크리스티가 푸아로와 그가 등장하는 첫소설을 구상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글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주변의 온갖 것들 가져다 조합하고 변형하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며 그동안 읽은 추리소설의 예를 검토한다.
소설 속의 인물과 대사와 사건이 실제 현실에서 가져온 것임을 발견하니, 재미있으면서도 당혹스럽다. 어떤 건 그대로 가져다 썼고 어떤 건 변형해서 썼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와 소설에서 가져다 쓴 것과의 차이다. 소설은 더 효과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현실의 것을 '제조'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성공 비결은 작가가 되려고 하지도 문학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재미로, 나중에는 일로 했으며 거창하게 예술 작품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플롯을 짜내면 어떻게든 이야기 글로 써냈다. 묘사니 서사니 문장이니 이딴 거 신경 끄고 일단 이야기의 얼개를 잡았다 싶으면 시장의 요구에 맞춰 자신이 써낼 수 있는 것을 썼다. "나는 나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는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기 능력 밖의 것에 대해서는 재빨리 포기했기에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자신을 알고 진로를 결정했다. "아무리 원하는 일이라도 이룰 수 없다면 현실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후회와 희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좌절이 일찍 찾아온 덕분에 나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전혀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의 육체적 반응을 조절할 수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애 여사님, 수줍음이 많으셨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 일들에 적성이 맞지 않았다. 혼자서 글 쓰는 작가가 딱이었다. 상상력이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고 문법이니 철자니 그 딴 건 신경도 안 쓰셨단다. 회화는 잘했지만 작문은 낙제였다고. 항상 주어진 주제에서 멀어진 글을 썼단다. 소설가 맞다. 소설은 상상으로 쓰는 것이니까.
작가란 무엇인가? 글을 어떻게든 써내는 사람이 작가다. "내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변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쓰고 싶지 않고,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마음에 안 들고, 잘 써지지도 않음에도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전문 작가의 무거운 짐을 그때 짊어졌던 것이다." 그렇다.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다.
201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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