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 수배
퍼트리샤 콘웰 지음
김백리 옮김
노블하우스 펴냄
Black Notice (1999년)
고정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형식인 시리즈를 쓸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이야기 주도권을 작가가 아닌 캐릭터가 쥐는 것이다. 도일은 홈즈를 이야기에서 죽여 버렸고 크리스티는 푸아로가 죽는 이야기를 미리 써 놓고 발표를 미뤘다. 스카페타 시리즈 10편에 무려 10년이 넘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이제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이 통제불능인 상태에서 작가는 작가대로 이야기의 틀을 만들어놓고 진행한다.
지난 9편에서 시리즈 주요 4인 중 1명인 벤턴 웨슬리가 죽었고 이번 10편에서 그 파장이 남은 3명에게 대대적으로 미친다.
케이 스카페타는 연인이 죽은 슬픔에서 벗어나질 못해 그러지 않아도 일중독인데 그 정도가 심해진다. 프랑스 출장에서는 연하남과 하룻밤 섹스에 빠진다. 이 점은 이번 편만 보면 생뚱맞아 보인다. 뭐야, 갑자기? 골트 3부작(4편 사형수의 지문, 5편 시체농장, 6편 카인의 아들)처럼 이번 10편으로 '늑대 인간 3부작'이 시작된다. 제이 톨리는 다음 편과 다다음 편을 위한 복선이다. 자세한 얘기는 스포일러가 될테니 삼가겠다.
마리노는 윗선 정치에 밀려 형사에서 순찰직으로 사실상 퇴직 압력에 처했다. 스카페타가 내 밑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는데 말로는 화를 내도 내심 고마워하는 눈치다. 어설픈 신참내기 형사가 인터폴이 개입하는 연쇄살인 사건을 맡아 실수투성이다. 열심히 하려는 성의도 없다. 윗사람한테 잘 보여서 승진이나 하려는 인간이다. 마리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케이가 프랑스에서 젊은 남자랑 하룻밤 정사를 벌이자, 마리노는 어마어마하게 화를 낸다. 죽은 벤텐 웨슬리 생각에 본인 질투까지 합세했다.
삼국지의 유비와 장비를 보는 것 같다. 상스러운 말과 과격한 행동을 해도 속마음과 의도는 착하다고 믿기에 마리노를 감싸는 케이. 툭 화면 화내고 욕하고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케이를 종종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하지만 충성심과 애정은 절대 불변인 마리노.
케이의 조카 루시는 여전히 동성애 중이다. 평소 총을 좋아했기 때문인지 재무부 산하 연방 알코올 담배 및 총기단속국의 수사관으로 일한다. 루시와 루시의 애인이자 동료인 조가 위장이 틀통나서 큰 부상을 당한다.
루시의 엄마이자 케이의 여동생인 도로시는 여전히 이기주의자고 남자들과 놀아나는 것이 즐거움이다. 술에 취해서 막장 드라마처럼 주인공 케이를 비난하고 나서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더라. "언니가 왜 그렇게 비쩍 말라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아. 매일 죽은 시체에서 갈비뼈나 떼어내고 범죄현장을 누비거나 하루 종일 시체안치소, 그 지랄 같은 바닥에 서서 일하는데 살찔 틈이 있겠어?"(2권 86쪽) 자기 딸이 자신보다 자기 언니를 더 따르고 더 사랑하는 것에 단단히 삐쳤다. "내 딸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유일한 자식한테. 항상 바쁘시니 아이를 가질 시간이나 있었겠어? 그래서 내 외동딸을 빼앗아 간 거야."(2권 86~87쪽)
이야기 규모는 10편에 와서 확실하게 커졌다. 참으로 우연히도 인터폴에서 주목하는 살인범이 애써 주인공 스카페타의 근무지역인 리치먼드까지 오셔서 연쇄살인을 저질러 주신다. 편리하게도 마침 그동안 잘 알고 지내던 상원의원이 인터폴과 잘 아는 사이다. 끝으로 예전 시리즈에서 그랬듯 이상하게도 살인범이 주인공을 굳이 위협하고 죽이려고, 실은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지만, 케이 집에 나타나 주신다. 얼마나 고마운가. 감사합니다, 범인님.
옮긴이 김백리의 이름이 특이하고 '옮긴이의 말'이 정제된 문장력을 보여서 이 사람 도대체 누구인가 검색해 보니, 역시나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김백리는 필명이었다. 본명 김은숙. 위암으로 2011년 별세했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부미방)의 주역이었다. 좌파 운동권에서 유명했던 모양인데, 그 사건 후로 조용히 살려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미국 자본주의 대중소설인 스카페타 시리즈의 한 권을 번역하게 된 것일까. 옮긴이의 말에 보면 영국 체류 시절에 책을 좋아해서 도서관과 서점을 자주 들렸는데 콘웰의 책이 워낙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다 보니 눈에 띄었고 가난하다보니 가까운 헌책방에서 콘웰의 책들을 사서 읽었단다. 때마침 번역할 기회까지 얻었다.
김은숙은 '케이, 마리노, 루시'를 '유사 가족 공동체'라고 하고 주인공이 하버드 출신에 부잣집 도련님과 눈이 맞아 버린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고 적어 놓았다. "자칫 인간성을 상실할 위기에 있는 이 험악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스카페타 박사의 눈을 통해 나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견지해야 할 태도를 끝까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2권 336쪽) 싸구려 범죄소설에 이토록 진지한 의미를 부여한 걸 보면, 이 사람 참 인생 올곧게 살려고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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