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애거서 크리스티
권도희
황금가지
★★☆☆☆
우리말 번역본 제목이 '누명'인데, 영어 원서 제목은 Ordeal by Innocence 이다. '결백한 사람들이 받는 시련'이라는 뜻이다. 책 맨 앞에 성경 욥기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다.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다.
'누명'의 설정은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좋은 아이디어다. 초반 호기심 유발과 긴장감 조성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니까. 하지만 중반은 지루했고 후반에서야 추리소설다웠다.
잭(애칭은 재코)는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던 중 페렴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이후 2년이 지났다. 범행 시각에 잭을 차에 태웠다는 사람이 가족들 앞에 나타난다. 이제서야 잭의 결백이 입증된다.
문제는, 이제 남은 가족 혹은 집안 고용인들 중에 한 명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시련이 시작된다. 딱 여기까지만 근사하다.
이후 용의자들의 내면묘사가 그려진다. 그 수준은 대중소설 수준을 못 벗어난다. 따분하게 읽혔다. 이렇게까지 각 인물들의 과거사와 속마음을 말해 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특히, 트릭과 범인 잡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추리소설에서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그 심리와 감정의 깊이가 얇다. 그 인물들의 성격이나 심리를 깊게 알고 싶지도 않고 필요하지 않다. 추리 게임에서 그럭저럭 즐길만한 정도면 그만이다.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독자들은 범인을 대강 추측하기 시작하는데, 가장 흔한 동기인 돈에서 용의자들 전부가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도 초반에 이렇게 밝혀지나. 어찌나 갑갑하고 맥이 빠지던지.
별다른 단서도 힌트도 없다가 거의 끝에 가서 범인이 자신을 범인으로 목격했다고 생각한 이들을 살해 혹은 살해 시도를 하다가 들키는 식으로 끝난다. 범인은 도망친다.
이 후반부가 그나마 트릭도 있고 전개가 빨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커플 탄생과 청혼으로 끝나는 건 좀 엉뚱하다 싶지만.
폭군 가장 밑의 여러 사람들이 살인 용의자가 되는 식은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와 '죽음과 약속'에도 나온다. 특히, '죽음과의 약속'에서 보여주는 심리 묘사는 '누명'과 달리 뛰어나다.
'누명'은 이미 폭군이 죽은 후라서 아무래도 각 인물의 감정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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