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이은선 / 엘릭시르
환상의 여자
윌리엄 아이리시
양병탁 / 동서문화사
Phantom Lady (1942)
'환상의 여인'은 추리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가 피해야할 작품 1순위다. 하지만 이 책이 세계 3대 추리소설 중에 하나로 올려져 있어 안 읽는 사람이 드물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도움말은 하나다. 지나친 기대를 삼가는 것이 좋다.
멋진 미스터리를 바라는 독자에겐 지루하고 허무하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에 감시카메라가 발달한 시대에 이 소설의 설정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된다. 옛날 얘기다. 옛날이니까 그나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여자를 분명히 여러 사람들이 봤는데도, 모조리들 부인하고 나선다. 나 혼자만의 환상인가. 소설 초반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고 신비롭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게 궁금하고 이상해서 끝까지 읽으면 반전이 놀랍다기보다는 허무해서 미쳐버린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긴장 구조를 만들어낸다. 살인 발생. 또 살인. 또 살인. 범인 정체가 밝혀짐. 자신의 살인을 감추기 위해 살인이 연이어 일어난다. 이 소설이 그런 구조에서 다소 특이한 점이라면, 그 환상의 여자를 목격한 사람들을 추적하여 추궁하는 과정에서 살인 혹은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형사 바제스는 스콧 헨더슨을 체포하고 재판에서 사형까지 받아내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적으로 조사단을 꾸린다. 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애인과 친구다! 가장 사랑하는 애인 캐럴 리치먼과 가장 신뢰하는 친구 잭 롬버드.
스콧의 사형집행 일이 가까워 오는데, 결정적인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사고나 살인으로 참으로 절묘한 순간에 죽고만다. 도대체 누가 왜 '환상의 여인'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며, 스콧의 아내를 죽인 살인범은 누구인가?
롬버드는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서 '환상의 여인'이 그날 썼던 요상한 모자를 추적한다. 그 모자는 복제품이었고 그 오리지널은 그날 공연자가 쓰고 있었다. 그 배우한테서 모자 제작자를 알아내고 모자 제작자한테서는 그 복제자를 알아내고 복제자한테서는 그 복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사람을 알아낸다. 아직 안 끝났다. 바로 그 요청자가 그 모자를 줘 버린 여자를 알아낸다. 그 여자가 그 여자다. 플로라. 자, 이제 끝났나? 절대 아니지. 메롱메롱, 멍멍.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고나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독자는 황당한 상황에 처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사형 집행일 당일에서야 가까스로 '환상의 여인'을 잡았다. 달려, 달려. 스콧을 구하자!
추리소설에서 반전을 크게 만들려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을 충실하게 실행하면 된다. 독자의 코앞에 범인과 결정적 힌트를 두고 계속 아닌 척하다가 끝에서 터트린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을 뒤집으면 놀라움은 커지는 법이다. 절대로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가 범인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도 연기의 신 트릭이 나온다. 고전 추리소설들은 이 트릭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애용하는 양식이고 다른 추리소설도 이야기에서 밥 먹듯 쓴다. 그렇게 분장과 연기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아주 쉽게 생각하고 그렇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당연시한다.
이 소설의 매력은 문체다. 도시의 우울한 정서를 독특하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추리소설 독자보다는 개성적인 문장을 선호하는 문학 애호가를 위한 책이다. 문장 스타일 하나만큼은 끝내준다. 경이롭다. 천재다.
시작부터 시처럼 빛처럼 음악처럼 흐르고 펼치며 채색되는 문장이다.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그러나 밤의 공기가 감미로운데도 그의 기분은 씁쓸했다."(양병탁 옮김) 영어 원문을 보면 더욱 그렇다.
"The night was young, and so was he. But the night was sweet, and he was sour." 운율 맞춘 문장.
이 멋진 문체로 쓴 소설이 왜 하필 범죄소설인가. 안타깝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재능이 탁월하지만 왜 이렇게 분위기가 어두운지. 아깝다. 어쩌겠는가. 그저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썼겠지. 간단하고 명료하게 쓴 문장으로 추리소설을 써도 되는데, 휘황찬란하게 눈부신 문체라니. 게다가 너무 장황하다. 문장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좋다.
아이리시의 소설 스타일은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도입부, 암담하고도 우울한 분위기, 흥미롭고 긴장감 높은 상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누아르의 아버지로 불린단다. 많은 작가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셨다.
◆ 독서 기록
1회독 2014.06.03 엘릭시르 종이책
2회독 2015.07.08 동서문화사 전자책
The night was young, and so was he.
밤이 젊다니 무슨 말인가?
직역해도 대충 의미는 알 수 있어서
의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The nigh is young. 초저녁이다.
The nigh is still young. 아직 초저녁이야.
관용 표현이다. 시적인 표현을 위해
일부러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대체로 계속 술 마시러 가자고 할 때 쓴다.
소설에서 주인공 남자가 술 마시러 술집에 들어간다.
의역해 보면 이렇다.
초저녁이었고 그는 젊었다.
운율을 맞춰 쓴 뒤의 문장 때문에 대개들 직역했다.
초저녁이라고 번역한 곳은 딱 한 군데였다.
5월의 초저녁에
풍기는 상큼한 공기가
풋풋한 그의 젊음과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 창 이승원
이승원은 철저한 의역을 추구했다.
원문 문장 구조를 무시하고
뜻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치중했다.
밤은 젊고 그 역시 젊었다. - 엘릭시르 이은선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해문 최운권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동서문화사 양병탁
202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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