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루주 사건
에밀 가보리오 지음, 박진영 엮음, 안회남 옮김/페이퍼하우스
'르루주 사건'은 셜록 홈즈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세계 최초 추리 장편소설'이다.
성지를 순례하는 자의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계하고 새하얀 표지를 살포시 열어 조금씩 읽어나아갔다. 초반은 놀라웠다. "셜록 홈즈가 나타났다." 중후반은 반전에 반전이었다. "그러니께 그 아가 그 아가 아니라는 말이여, 시방."
코난 도일은 '주홍색 연구'에서 에밀 가보리오의 르콕을 언급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셜록 홈즈의 모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반대되는 편이다. 그럼 도대체 홈즈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타바레다. 캬바레? 춤 선생?
타바레는 범죄 수사가 순전히 취미인 노신사다. 자기가 탐정 일을 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한테 숨기며 지낸다. 고객의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돈을 쓴다. 사례금을 받는 후대 탐정들인 포와로나 홈즈와는 다르다. 비영리 탐정이다.
이 "선량한 기독교"(49쪽)인은 효자 노릇하느라 젊었을 때는 뼈빠지게 일만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진 후에야 부자가 되었다. 늙은 나이에 딱히 할 일도 없고 돈으로 향락을 즐기기에는 너무 늦었고, 해서 재미를 붙인 것이 책 수집이었다. 특히 열심히 수집한 분야가 범죄였다. 산 책은 모조리 읽어 치웠다. 수기든 논문이든 뭐든 아낌없이 돈을 써서 사서 모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사 전문가가 되었고 경시청 고문 탐정으로 유명하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럼 르콕(책에는 르코크로 표기했다. 코르크 마개?)은 뭐야? 타바레를 소개하며 추천하는 형사다. 일선 경찰 공무원이다. 직급이 낮고 젊다. 경부의 부하로 나온다. 경부? 옛날 번역이라서 이 단어를 썼다. 오늘날 6급 경감이다. 르콕은 아무리 높아야 7급 경위다. 분위기로 봐선 8급 경장 정도로 보인다. 잠깐 등장한다. 이 소설의 주역은 르콕이 아니라 타바레다.
르루주 사건이라는 제목은 직역이다. 의역한다면 '과부 르루주 살인 사건' 정도 되려나. 영문 번역본 보니 과부 르루주(The Widow Lerouge)다. 중요한 것은 르루주가 살해된 과부의 이름인 동시에 피와 범죄를 암시하는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코난 도일은 제목마저 알뜰하게 가져다 쓰셨다. 더 문학적으로 더 좋게 다듬어 썼다. '주홍색 연구'는 범죄학을 뜻한다. 서양에서 주홍은 죄를 상징하는 색이다. 4장 후반부에 제목을 설명하는 문장이 나온다. "인생의 무색 실타래를 꿰뚫은 살인의 주홍색 실이 있다." 1921년 우리나라 최초 번역본의 제목은 '붉은 실'이었다.
도일이 사건 내막을 밝히면서 미국 특정 종교 단체의 역사와 로맨스를 주구창창 써내듯, 가보리오는 사건 배후에 숨겨진 가족사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로 써놓았다. 초반의 반진감 넘치는 추리는 중반부터 꼬이고 또 꼬인 '친자식 찾기'로 줄어들더니 이내 증거 재판주의는 불완전하다며 감상적인 결말에 이른다.
반전의 재미를 주기 위해서라지만 타바레의 멋진 추리를 스스로 뒤엎는 결말은 아쉽다. 추리소설이라는 알약에 멜로드라마라는 초콜릿을 발랐다. 작가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1863년 당시 신문 연재 소설은 오늘날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인기가 높은 오락물이었다. 철저한 추리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에는 무리였으리라.
고전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현재의 우리 기대 수준으로 보면 너무 단순하다. 부재 증명을 안 한다고 해서 지금껏 살인자로 여겼던 이를 결백하다고 장담하질 않나. 논리를 버리고 심증으로? 마침내 범인이 밝혀진 부분에서는 "그 공포에 찬 얼굴은 처참하도록 범죄가 발견된 자의 특유한 모양을 하였다."(198쪽) 같은 순진한 문장도 나온다. 웃을 대목이 아닌데 웃고 말았다. 이야기의 결말을 위해 때마침 알아서 죽어주는 등장인물들까지. 그래도 초반 추리는 훌륭하다.
이 책은 번역에 대해서 반드시 언급해 두어야 한다. 1940년 안회남이 번역한 것으로 그대로 가져다가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말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가끔씩 요즘 쓰는 말이 아닌 단어가 튀어나와서 당혹스럽다. 출판사의 의도는 역사적 기록에 있는 것은 알겠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불편했다. 예스러운 말투가 어색하다. 그래도 그럭저럭 읽을 만은 하다. 오늘날 말투로 제대로 번역해서 나왔으면 좋겠다.
국내 추리소설 독자들의 필독을 바란다. 셜록 홈즈의 기원이 된 '타바레'를 모르고 어떻게 감히 추리소설 애독자라고 말하겠는가. 어서 빨랑 재깍 읽어 줘라, 눈물 닦을 손수건을 들고서. 아, 이리하여 변사는 변을 눈다는 변을 하고 변소로 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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