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브라이드
윌리엄 골드먼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모겐스턴 지은 책을 윌리엄 골드먼이 재미있는 부분만 발췌, 요약, 편집한 책이다.
왜 원작 전부가 아니라 애써 요약본으로 읽어야 하는가? 편집자가 직접 책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지루하게 많이 독자를 배려하지 않고 이야기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세부 묘사와 재미없는 역사, 전문적 기술의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서다. 이와 큰 상관이 없거나 몰라도 되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아예 없어야 읽는 재미를 잃지 않는다.
원전 숭배자들은, 소설이든 클래식 음악에서든 원작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백경’에서 쓸데없이 장황한 부분을 모조리 한 자도 빠짐없이 읽어야 하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서 반복하라는 지시사항을 무조건 따라 연주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진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생략, 삭제, 축약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되기도 한다.
프린세스 브라이드, 이 책은 원전보다 편집본이 더 유명하고 더 많이 읽힌다. 아니 원전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골드먼의 ‘프린세스 브라이드’로 알려졌고 그렇게 읽힌다. 이 소설의 영화 시나리오를 골드먼이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이 재미있냐고? 너무나 명백하게 재미있다. 증거는? 이 책 서문 제목을 보라. 무려 ‘30주년’ 기념판에 부치는 서문이란다. 어떤 책이 절판이 되지 않고 30년 이상 꾸준히 팔리고 읽혔다면 성경이나 교과서, 혹은 수험서가 아닌 이상 재미있는 책이다. 재미없는 책을 바보가 아닌 이상에 도대체 누가 왜 무엇을 하려고 사서 읽겠는가.
이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어려서 책 읽기를 싫어했단다. 물론 글쓰기도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야기의 마술에 사로잡혔다. 바로 이 책 ‘프린세스 브라이드’를 아버지가 읽어주셨는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 일 이후에 그는 온갖 책을 그야말로 백 년 굶은 귀신처럼 먹어치우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가 되기에 이른다.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지도록 나를 이끌었다.”(22쪽)
따라서 그에게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그냥’ 책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운명’의 책이었다. 골드먼은 아버지한테서 구술로 듣기만 했던 책을 실제로 구해서 읽어 보니 영 딴판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뛰거나 요약해서 들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자기 아들한테도 똑같이 일어난다. 저작권 문제와 원작 훼손 문제로 골치가 아플 것이 뻔했지만, 윌리엄 골드먼은 재미있는 부분만 편집한 책을 낸다.
모겐스턴의 원작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그 난리일까 싶을 것이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일 정도로 무명작가인데 말이다. 하지만 ‘프린세스 브라이드’ 이야기가 플로린의 역사를 대부분 반영하고 있으며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믿기 힘들겠지만, 여기까지가 모조리 작가의 창작이다. 다 꾸며낸 이야기다. 모겐스턴이라는 작가는 실제로 없다. 플로린이라는 나라도 없다. 이 책 앞에 붙은 서문 두 개도 죄다 그럴 듯하게 보이게 쓴 소설이다. 스티븐 킹이 전화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다. 서문에 나오는 아내, 아들, 손자 등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꾸며낸 작중 인물이다. 번역본을 낸 출판사 현대문학에서는 서지사항에 지은이를 모겐스턴이 아니라 골드먼로 표기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 억울하다고? 나도 속았다! 그리고 분했다.
실제 플로린이라는 나라가 있었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뭔가 이상한 것이다. 많이 들어 본 단어인데 뭐지? 뭐야? 플로린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화 이름이라고! 속았군! 하여, 나는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속았는지 진술함으로써 나의 결백을 입증했다. 나도 속았다고!
지나치게 진지하고 엄청나게 성실하며 너무나도 순박하게 사는 사람한테는 꾸며낸 이야기, 소설, 재미있는 거짓말이 터무니없는 ‘잉여 짓’이다. 그래서 책을 읽긴 하지만 픽션은 안 읽는 사람도 있다.
꾸며낸 이야기인데 들은 사람이 진짜로 믿을 때, 꾸며낸 사람은 그렇게 속은 사람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심지어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은 사람조차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과 허구를 섞기 시작하면 이 둘을 구분하기 무척 어렵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가짜 책, 가짜 작가를 꾸며내서 이야기를 쓴 사람이 골드먼이 처음은 아니다. 누가 처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잉여 짓으로 가장 유명한 작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다. 하지만 가짜 서문과 가짜 요약문까지 만들어낸 인간은 아마도 이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 아주 뻔뻔스럽게 사실인 양 쓴다. 대놓고 재미있는 부분만 요약한 것이라고 써놓았는데, 그게 꾸며낸 것임을 알아챈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얘기가 길었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소설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설령 액자 이야기를 사실인 줄 알고 속았다고 하더라도 본문 그림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웃기고 유쾌하다. 작가가 독자를 웃기고 즐겁게 하려고 작정하고 쓴 문장은 쉽고 빠르게 술술 읽힌다.
갖가지 과일 맛이 나는 사탕을 깨물어 먹는 듯한, 캐릭터들의 파티다. 옛 사랑을 되찾으려는 해적.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는 검객. 세계 최강 힘센 장사 거인. 사냥에 미쳐서 층마다 사냥감을 길러 사육하는 왕자. 육손 백작. 상대의 생각을 읽는 사기꾼.
기존 동화 이야기와 흔하게 반복되는 캐릭터 이야기를 가져다가 비틀고 혼합한 칵테일 같은 소설이다. 영화로도 봤는데, 슈렉의 할아버지쯤 되는 영화다. 소설이 더 재미있고 더 낫다. 영화는 웃기려다 만 것 같다. 다소 어정쩡한 느낌이다. 영화에서는 안 나오는, 캐릭터들의 속사정과 굴곡진 사연을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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