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팬인가? 아니라고 답해야 하리라. 이 일본 사람의 소설에 열광한 적이 없으니. 읽어 본 책은 [상실의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밤의 원숭이]가 전부고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밤의 원숭이] 정도다. 하루키라고 찍힌 책만 보면 무조건 집어 들진 않으니까, 팬이라 할 수 없다. 욘사마 일본 가듯 하루키 한국 와서 "제 책입니다. 제 사인도 넣었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제발 읽어 주십시오." 하고 내게 간곡히 청한다고 해도, 안 읽을 터이고 책은 받아서 하루키 팬한테 비싼 값에 팔 것이다.
구십 년대 학창 시절 나의 자아 상실감은 하루키의 그 느낌과 달랐다. 운동권도 비운동권도 아닌 회색주의자로 불렸으니. [공산당 선언]을 읽고 있으면 선배한테 괜한 오해를 받았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고 학생회 조직의 폭력성에 대해서 비난하면 또 이상한 눈총이 쏟아지는 거였다. 나중에야 [월든]을 읽고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이십 세기는 사라졌다. 이 책을 집어 든 사람들 대부분이 품었을, 아스라한 추억과 가슴 떨리는 감정이 나한테는 없었다. 그가 소설가라는 점과 그가 소설을 어떻게 쓰려 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을 때 헤맸다. 분류번호가 일본문학이 아닌 한국수필이다. 이상하네, 일본 작가 인터뷰가 한국 문학, 그것도 수필로 분류되다니. 집에 와서 천천히 읽어 가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놀랍게도, 이 책은 하루키와 직접 인터뷰한 책이 아니었다. 글쓴이는 하루키를 직접 만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썼을까. 책 맨 끝에 붙은 참고 서적을 보라. 그 책들로 짜깁기한 것이다.
짜깁기는 깔끔하고 정갈하다. 진짜 하루키와 인터뷰한 걸로 착각할 정도다. 문장이 매끈하다. 흥미롭게 잘 썼다. 거기에 적절한 그림을 더했으니, 읽기는 수월했다. 다만, 독자들이 그다지 관심이 없을 자기 얘기를 넣은 것은 절제의 미덕에서 벗어난 일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정도면 좋았을 걸. 한창 하루키 삶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사람이 등장해서 자기 얘기를 하니, 읽는 사람으로서는 흐름이 끊어져 불편하다.
170쪽 "이 글은 가상의 인터뷰이며,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답변 내용은 그의 실제 인터뷰 글을 토대로 하여 작성되었다."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글쓴이가 직접 하루키와 만나서 인터뷰를 한 줄만 알았다. 이런 가상 인터뷰는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에서 자주 하는 편이다. 어떻게 옛날에 죽은 사람과 이렇게 인터뷰를 했지 싶어 살펴 보면 '가상 인터뷰'인 것이다. 예전에 하이텔 시절에 어느 동호회 게시판에 '쥐스킨트 인터뷰'가 올라와서 기쁜 마음에 읽었다가 나중에 그게 '가상 인터뷰'였다는 걸 알았을 때 낭패감이란 참. 제발 '가상 인터뷰'라고 글 맨 앞에 써 놓으란 말이야, 그렇게 작게 말고 크게 써 놓으라고, 이 허풍선이들아!
하루키에 대한 소식은 구십 년대 초반 이후 나에게는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기에, 이 책이 전하는 하루키의 소식은 놀라웠다. [상실의 시대]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배신과 비난에 고생했다니. 세상 일이란 좋은 면과 나쁜 면이 함께 있는 것이로군. 일본 사회에 어울리지 못해 외국을 떠도는 방랑객 세월을 보냈다니, 가여웠다. 그러게 돈과 명성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니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은, 뜻밖이었지만 좋아 보였다.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남은 가슴 찡했다.
작가 지망생한테 유익한 충고가 많다. 하루키의 지난 삶에서 알 수 있듯,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그 어떤 예술 작품이든 열심히 감상하고 즐긴 후에야 자신도 예술 작품을 만들 용기가 생긴다. 하루키의 성공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루었다. 어느 분야건 공짜는 없다. 그냥 어디 한번 해 볼까 하며 덤비는 게 아니었다. 꾸준히 연구하고 시도하고 노력해서 완성했다. 글이 잘 안 써진다고 불평하기 전에 하루키만큼 책을 읽었는지 반성해 보라. 또 하루키만큼 써 봤는지 자신한테 물어 보라.
하루키는 '나의 북극성'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작가다. 모범이 될 만한 소설가다. 글쓰기에 대한 신념과 헌신. 그 점은 모든 작가 지망생과 이미 작가인 사람도 배워야 하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팬이든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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