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은행나무
2011.08.22.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는 자연 사랑에서 삶, 우주, 자유를 사색한 미국 지식인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박한 마음을 지닌다.

값비싼 의식주를 얻기 위해 소중한 삶의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리리 한 달만 정직하게 일해서 나머지 열한 달의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삶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여유 시간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인 자연 관찰과 글쓰기로 보냈다.

대학 도서관 기부금 요청에 5달러를 보내며 "더 기부하고 싶지만 지난 4개월 동안 내가 번 돈을 전부 모아 봐야 이 금액에도 못 미친다."라고 덧붙일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소로우의 글은 자연의 꾸밈없는 솔직성과 아름다운 위대함을 그대로 닮았다.

<야생 사과>: 사과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관련된 온갖 고전, 과학적 지식, 문헌을 종횡무진 총동원하며 삶의 깊은 의미를 풀어내는 이 놀라운 글솜씨! 글쓴이는 사과나무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다.

길들여진 사과나무의 열매는 순하고 평범함 맛을 지닌다. 그러나, 야생사과나무의 열매는 "활 시위를 당길 때와 같은 짜릿한 맛"이 난다. 소로우는 야생사과나무처럼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인간 사회 제도의 틀에 맞춰 살지 않고 자연이 가르치는 진리에 따라 살았다.

<돼지 잡아들이기>: 1856년 8월 8일 일기. 강에서 배를 저으며 명상에 잠겨 있던 소로우는 가출한 돼지(?) 때문에 사색을 중단하고 만다. "이 사건을 해결할 모든 책임은 나에게 귀착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나만 쳐다보셨고 나는 이제 강 쪽을 바라보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힘세고 날샌 돼지를 잡기 위해 이러 뛰고 저리 뛰는, 소로우와 그의 이웃들. 보통 돼지가 아니었던지 소로우의 아버지는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이웃 사람들은 대체로 동정적이었다. 온 읍이 우리 돼지를 화제로 삼았다. 사람마다 자기가 기르던 짐승을 잃고 속 상해 하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네 정겨운 시골 풍경이 떠오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신창원 원숭이 잡기가 생각난다. 온 동네를 휩쓸고 돌아다니는 그 원숭이 덕에 이웃들이 서로 친하게 되었단다.

<한 소나무의 죽음>: 1851년 12월 30일 일기. 거대한 소나무가 잘려 쓰려지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소나무의 죽음에 애도의 뜻으로 마을의 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로우.

<가을의 빛깔들>: 아름다운 가을 단풍의 빛이 글에 녹아 있다. 그에게 가을은 자연의 축제다. "이 10월의 축제를 여는 데는 경축 기념 대포를 쏘기 위한 대포알 비용이 들지 않으며 종을 울릴 필요도 없다. 나무 하나하나가 1천 개의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살아있는 자유의 깃대인 것이다." 낙엽에서 철학적 생각을 끄집어낸다. "낙엽들은 자신들의 무덤에 편히 쉬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공중에 흩날렸던가! 그처럼 높이 치솟았던 그들이건만, 얼마나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흙으로 돌아가는가! 나무 아래에 묻혀 썩어가며, 새로운 세대의 동족을 위하여 얼마나 기꺼이 자양분을 제공하는가! 이 낙엽들은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자신의 불멸성을 자랑하지만 낙엽만큼의 기품과 성숙함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날이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머리털이나 손톱을 자를 때처럼 '인디언 여름'과도 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 육신을 떠날 날이 과연 언제쯤 오겠는가?"

왜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보지 못하는 걸까. "자연 경관에서는 우리가 감상할 마음의 준비가 된 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외에는 눈곱만큼도 더 우리는 볼 수 없다." 마음의 여유, 우리는 그걸 잃어버렸다.

<시민의 불복종>: 소로우는 미국의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강하게 반발했다. "자유의 피난처임을 자임(自任)해 오던 나라의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또 한 나라의 전 국토가 외국 군대에게 짓밟히고 점령되어 군법의 지배하에 놓였을 때, 정직한 사람들이 일어나 반항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 때라도 결코 너무 이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의무가 시급한 것은, 이 짓밟힌 나라가 우리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침입한 군대가 우리 나라 군대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부과한 인두세(人頭稅)를 6년 동안이나 거부했다. 수선을 맡긴 구두를 찾으러 구둣방에 가려다가 감옥에 갇히고 만다. 친척의 대납으로 하루만에 풀려난 소로우는 이 체험을 글로 쓴다.

이 글은 개인주의의 위대한 힘을 보여준다. 세상을 참되게 변화시키는 것은 다수의 비위에 맞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정치꾼의 정책과 입법자의 법이 아니라, 정의와 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소수의 개인들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장래를 입법자들이 의회에서 보여주는 말재주에만 전적으로 맡기고, 일반 국민의 풍부한 경험과 효과적인 불만 표시로 잘못을 시정해 나가지 않는다면 미국은 머지않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엄정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내가 허용해 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진보해 온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한 진보이다. 중국의 철인조차도 개인을 제국의 근본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자연에 몰두했던 그가 이런 사회적 의미가 담긴 글을 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로우는 집단적인 사회 집단과 제도보다 개별적인 사람의 양심과 개성을 존중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정부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정부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위대한 개인주의자의 힘찬 목소리를 들어 보라. "정부는 한 인간의 지성이나 양심을 상대하려는 의도는 결코 보이지 않고 오직 그의 육체, 그의 감각만을 상대하려고 한다. 정부는 뛰어난 지능이나 정직성으로 무장하지 않고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기적이란 신이 어쩌다가 우연히 심심풀이 삼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필연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 그 기적에 대한 선언이다.

Posted by lovegoo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