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예담 펴냄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꽤 오래 전이다. 도서관에서 제목이 특이해서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모두 읽었다. 문장에서 펴낸 그 책은 절판되었다. 예담에서 펴낸 이 책보다는 더 많은 글이 있었다. 수필이 몇 편 더 있었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찾아 보면, 아마 있을 것이다. 많은 독자의 손을 거쳤기에 때가 많이 묻은 채로. 몇 쪽 정도는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인기가 높다.
입사동기한테 읽어 보라고 이 책을 권했다. 반응이 시큰둥이다. "어때요?" 하고 물으니,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한다. 이청준은 페터 빅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수필집 '야윈 젖가슴'에서 페티 빅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의 경향에 대해 투덜거렸다. 글의 겉만 읽고 속을 읽지 않은 탓이다.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하는 이런 류의 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이라 묶어 부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을 분류하고 구분하기 위한 문학 비평 용어이면서 현대 사회의 흐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이 계열이다. 이성과 언어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시시한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자,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실제로 자신의 발로 걸어서 지구 한바퀴를 일직선으로 걸어 보려고 한다. 앗, 문제가 생겼다. 바로 앞에 집이 있다. 그냥 돌아갈까 싶은데, 그러면 일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 그 집을 일직선으로 건너려면 사다리가 필요하다. 앗, 또 문제가 발생했다. 앞에 호수가 있다. 배가 필요했다. 앗, 앞에 높은 산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발명가가 있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여 오랜 연구 끝에 전화기와 TV를 발명했다. 이제 다시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발명품을 얘기하려고 하니, 그 발명품은 이미 세상에 쓰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발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 이렇게 만든 거구나 이해하며 다시 발명에 열중한다.
이런 사람도 있다. 책상은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 자신만의 언어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점점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결국 고립된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으려고 하자, 자신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더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먼저 알고 난 후에 그걸 알고 싶지 않기 위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다.
페터 빅셀은 말장난처럼 이야기를 꾸며 간다. 진지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실제로 읽어 보면 진지하다. 작가의 눈은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한다. 그의 마음은 사회의 약자를 끌어안는다. 진지함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말장난이었으리라.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우리를 위로하다니. 슬픈 일이다.
난 이 책을 읽고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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