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의 권유
이중재 지음
토네이도 펴냄
합격 수기는 A4 한 장이든 책 한 권 분량이든 '동화'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어렵게 힘들게 가까스로 공부해서 마침내 합격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반드시 그렇게 끝난다.
법정에 들어선 변호사는 사법 제도 자체의 모순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모든 합격 수기는 이렇게 쓰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만약 합격한 후에 사랑하진 않지만 돈만 보고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자신의 법률회사는 의뢰가 없어 망하고 말았다고 쓰면 안 된다.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재의 이 책은 '고시 합격 수기' 불문율을 그대로 따른다. 이 책 그 어디에도 시험에 합격한 후에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일을 성취했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합격 후 사연을, 독자는 알아서는 안 되며 작가는 알려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자, 핵심으로 들어가자. 도대체 이 사람의 합격 비결은 무엇일까? 제목처럼 독학인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지은이는 독학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실행을 추천한다.
"뭐야, 고작 그거야. 시시하네." 아니다. '반복 실행'이야말로 합격하지 못한 당신과 합격한 이들의 결정적인 차이다. 당신이 무슨 시험을 준비하고 있든 합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하지 않았다. 했더라도 반복하지 않았다. 반복했더라도 합격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광고문안을 보라. "알파벳도 모르던 축구선수에서 독학 4년 만에 사법시험 합격!" 솔직히 인정해라. 이 말에 혹해서 책을 샀거나 폈다고. 나부터 고백하겠다. 그렇다, 이 한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집었다. 인생 역전, 로또다. 그럼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들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복권을 비유로 들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긁지 않은 당첨복권과 같은 존재다. 실행이라는 동전을 꺼내 긁기만 하면 된다." 25쪽. 단, 문제점이 하나 있다. 무지하게 많이 반복해서 긁어 봐야 당첨 여부를 알 수 있다.
독학은 혼자 하는 공부가 아니라 독하게 하는 공부다.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지독할 정도의 노력, 그리고 행운의 화사한 웃음이 있다. 운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고시생을 위해서 수험 방법의 차별점을 얘기하자면, 일단 이 사람은 노트 요약 정리를 안 했다. 필기를 거의 안 했단다. 그는 책을 그저 여러 번 읽는 것만 했다. "책을 무한 반복해서 읽으니 더욱 자연스럽게 암기가 됐다." 64쪽 필기라고는 메모 정도였다. 잘 외워지지 않는 부분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자주 보고 이해가 되면 버렸단다.
사법시험 준비생은 대개들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안 되는 시험 때려치우고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은 데 취직할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서울대, 연대, 고대 출신으로 어느 정도 토익, 토플 점수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 취직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그만큼 고시에는 합격할 가능성이 떨어진다.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 떠나는 순간 포기요, 불합격이다.
이중재는 배수진이었다. 지난 축구생활 10년은 회복할 길이 없었다. 들어간 대학의 학과 공부는 이해되지 않아 중퇴하고 말았다. 이거 아니면 저거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사법시험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사법시험 공부를 억지로 했지만, 이 사람은 흥미를 갖고 재미있어서 파고들었다. 좋아해서 하는 사람은 못당하는 법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라. "신림동 입성 당시 내 목표는 사법고시 합격이 아니었다. '즐겁게 민법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다. 나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앎의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다." 86쪽.
내 지난 수험생활은 억지로 했던 것이었다. 가까스로 합격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냉소였다. 만약 자발적으로 의욕을 갖고 하는 공부였다면 보란듯이 합격해서 그들에게 복수할 힘이라도 있지. 그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수험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지옥이었다.
이중재에게는 전적으로 믿고 지원해준 부모님과 아내가 있었다. 내게는 그런 사람이 곁에 없었다.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신을 믿고 싶었다. 위선이었다. 차라리 주사위를 믿는 게 낫지. 한 문제 차이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살벌한 경쟁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 한 문제 차이로 합격하고 불합격도 했다.
이중재는 운도 좋았다. 91~92쪽. 사법시험의 외국어 과목이 토익, 토플, 텝스 시험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고시를 비롯하여 사법시험에 영어 시험은 정말이지 극악스러울 정도로 어려웠었다. 이젠 바뀐 것이다. 나조차 이때다 싶어 고시 볼까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이 사람의 사법시험은 자기의 길이었다. "남들 다 어려워하는 민법을 소설책 보듯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면서 '이 길은 내 길'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235쪽. 당신도 그러한가? 뭐 그럴 필요까지 있나. 그저 싫지 않으면 그럭저럭 하는 게 일이지 않은가.
나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고 있다. 아직 '실행'은 못했다. 과연 이 길이 나의 길인지, 정말 쓸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그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있고, 달리 딱히 그 외는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뿐이다.
당신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있든, 합격의 비결은 오직 하나다. 될 때까지 무한 반복 실행이다. 합격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경제력과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합격하는 순간, 당신을 업신여겼던 이들이 당신을 떠받는다.
무조건 반복 실행하라. 그러면 어쨌든 합격한다. 건투를 빈다. 합격한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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