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닥 공상 - 10점
A. 밀른 지음, 공덕룡 옮김/범우사

 


재미 ★★★★★ 무척 재미남
웃음 ☺☺☺☺☺ 밝고 명랑한 웃음
감동 ❤❤❤       조금은 훈훈함

 

앨런 밀른은 '곰돌이 푸'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수필을 썼다는 것과 장편추리소설도 한 권 썼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게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는 것도. 희곡도 썼는데 그게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 번역본은 그의 여러 권 수필집 중에 선별해서 묶어낸 것이다.

 

밀른의 수필은 괴짜에 속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필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교훈 같은 것을 바란다면 밀른의 글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그딴 거 하나도 없다.

 

밀른의 수필을 읽으면 푸근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소설 같은 이야기 솜씨 감탄하게 된다. 종종 읽다가 웃느라 정신이 없을 때도 있다.

 

 

 

 

 

일반 독자로서 읽는 사람한테는 재미있고 그냥 한번 킥킥거리고 넘어갈 책이지만, 수필가를 비롯한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한테는 상당히 기를 죽이는 책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끌어다가 아주 멋지게 써내는 솜씨는, 역시 노력으로 글 쓰는 게 아니다 싶다. '금붕어'를 읽고나면, 본인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으면 애초에 문학에는 뜻을 두지 말아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밀른의 글을 읽고나니, 뭔가 쓰려고 하면 결국 쓸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뭔가 거창한 소재나 대단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기식으로 자신있게 쓴다면 그 글은 나쁠 수가 없다고 본다.

 

평범한 소재를 비범하게 쓸 것. 그것이 작가의 기질이지 않을까.

 

 

책 제목과 같은 '한 가닥 공상'은 수필이지만, 작가의 소설가적 자질을 엿볼 수 있었다.

 

신문에 난 세 문장짜리 광고에서 뽑아내는 이야기는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곰돌이 푸의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패트, 당신이 찾아오셨을 때, 저는 혼자 있었어요. 당신은 내가 개에게 하는 소리를 들으셨던 거예요. 제발 다음 약속 일시를 알려주세요. - 데이지"

 

가끔 보면 현실에서 소설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대개의 글이 피식 웃고 말 수도 있겠지만 '금주에 관하여'는 날선 비판이 비수처럼 숨겨 있어, 놀랐다. 흡연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것이, 워낙 옛날 글이라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그 밖의 글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아주 멋드러진 풍자와 기가 막힌 유머를 선사해 준다.

 


쉽게 읽혔고 웃기고 재미있었다.


밀른의 추리소설 '빨강집의 수수께끼'를 다시 읽어 봐야겠다.

 

우스개와 상상력으로 버무린 풍자

수필집 '한 가닥 공상'의 작가는 동화 '곰돌이 푸'와 추리소설 '빨강집의 수수께끼'로 유명한 바로 그 밀른이다. 못말리는 유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여유로운 농담이 돋보인다.

유머 감각은 타고난 자질 같다. 연습하거나 노력해서 이렇게 위트 넘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단편소설 같은 수필이다. 읽으면 솔직하고 담백한 웃음을 짓게 한다. 전쟁 중, 혹은 전쟁 앞뒤에 쓰여진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평하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밀른의 수필집 'Not That It Matters'와 'If I may' 두 권에서 16편을 골라 편집하여 번역한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수필집은 이 책이 유일하다.

원서 수필집 제목부터 밀른의 개성이 드러난다. 넉살 좋은 익살이다. 서문에서 글 수록이 발표순이 아니라서 뒤죽박죽인데 그건 문제될 게 없다 Not That It Matters 고 쓰고 첫 수필집으로 제목으로 가져다 쓴다. 다음 수필집 제목은 더 웃긴다. 첫 수필집이 작가의 예상을 깨고 많이 팔리자 두 번째 수필집 서명에 까짓 그러면 If I may 한 권 또 내 볼까 offer another collection 라 쓰고 제목으로 붙인다.

 

 

신문 기고용 글인 칼럼은 분량을 엄격히 제한한다. 반면 그 소재는 거의 무한이다. 대개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 차례가 온다. 밀른은 매주 목요일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친숙한 소재를 가져다가 1천 자 내로 글을 쓴다. 골프, 금붕어, 금주, 금연, 신문 광고, 시골길, 신문 판매점, 오렌지, 점심 먹을 때 식당에서 들은 이야기 등 그야말로 주변에 지천으로 깔린 흔한 소재를 가져다가 기가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솔직하고 정직한 자세의 씨앗은 웃음과 공감의 꽃으로 피어난다. '일기 쓰는 습관'에서 사람들 대부분이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가상의 일기를 써서 보여준다.

"월요일 오늘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하루였다. 출근 길에서 깡패 두 놈을 쏴 죽이고, 별수 없이 명함을 경찰에 주었다. 화요일 변호사로부터 서신이 왔다. 톰긴즈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금광업자의 유언에 따라 내가 백만 폰드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왔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일상생활을 쓰는 일기는 그야말로 따분할 수밖에 없다. 날마다 흥미진진하고 소설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니 일기를 애써 써야 할 필요가 없다.

본인이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은 이상 일기가 책으로 발간되어 후세에 계속 읽히지 않으니, 더더욱 일기를 쓸 이유가 없다. 당신은 일상과 자연에서 철학과 문학을 뽑아내는 헨리 데이빗 소로가 아니며 그대는 일기장을 키티라고 부르며 은신생활을 글로 쓰는 안네가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써 둬라. 사후명성을 얻는 작가가 될지는 소로도 안네도 몰랐다.

일기를 쓰는 자는 상당히 예외적인 욕망을 지닌 자다. 우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로써 십 분의 일 사람들이 남는다. 글 쓰는 걸 좋아하더라도 날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이로써 앞서 십 분의 일 사람들 중 백만 분의 일 사람들이 남는다. 날마다 "무엇인가 종이에 쓰지 않으면 못 배겨서, 그들의 감정에 관해서 무엇인가 독특한 쓸 재료를 구하려 하는" 자가 바로 일기를 쓰는 희귀별종인 것이다.

우스개와 말장난이 흐르는 글에서 인간의 위선을 고발하는 '지성'이 솟구친다. 과식과 과음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매섭게 찌른다.

"라이스 푸딩 5인분을 먹었대서 낯설은 사람에게 추근추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맥주 다섯 병을 들이키고 나면, 사람은 '어디고 떳떳이 못 갈 데가 없지만, 집에만은 안 가겠다.'고 한다. 어쩌된 영문인지, 과식은 동물성의 표상으로 생각되고, 폭음은 좋은 친구의 표징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일상을 뒤집어 생각해 보라. 그러면 때때로 삶의 지혜가 보인다. 보통 영수증에 기입하는 Received with thanks를 Declined with thanks로 뒤바꿔서 가상의 거절 클럽을 상상하며 너스레를 떨어보자.

"여러분은 D·W·T <뜻은 고맙지만 사절> 클럽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이 클럽의 모토에 가라사대, '거절할 줄 아는 자는 복을 받나니라. 그들은 마음을 청결히 할 기회를 누리기 때문에…….'"

"태평성대의 제도에 대한 일대충격 - 금전의 신을 한 대 때려서 비틀거리게 하고, 자부와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일격"을 날려 보자. 로또 1등 당첨금 35억2천 만원을 거절하자! 이 더러운 자본주의 배금주의 사회의 가증스러운 속물들한테 태풍 같은 한 방을 날려 보세.

권력과 명예에 정신이 팔린 '미치광이들'한테 달마 도사님의 비웃음을 보내자. 대통령 직속 치킨창조경제개발괴발 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거절하라.

밀른의 수필을 읽으면 마음이 시냇물에 두 발을 담그고 기분이 종달새처럼 날아오른다. 일에 지친 이들이여, 한 가닥 몽상에 빠지는 것은 결코 일상의 잉여가 아니요 인생의 잉어를 낚는 것이라오.

덧붙임 : 옮긴이 공덕룡이 쓴 작가론 글 끝에 크리스토퍼 로빈을 밀른의 딸이라고 잘못 썼다. 아들이다. 그 유명한 위더 더 푸의 등장인물이기도 한데, 왜 틀리게 썼을까. 아마 사진만 보고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다. 단말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아이였으니, 소녀로 볼 수도 있었겠다 싶다. 실은 나도 처음에는 여자 아이인 줄로 알았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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