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킨 반지의 제왕 - 권력 욕망을 반지로 표현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1995년이었다. 그땐, 재미없었다. 지루했다.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틈만 나면 시를 읊지 않나. 그 많고 생소한 언어들. 종족마다 언어가 다르다. 공용어라는 게 있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부록으로 끼여 있는, 연대기와 가계도의 방대함에 질려 버렸다. 억지로 다 읽었다. 그리고 다시는 읽지 않기로 했다. 최근 영화로 나왔다고 해서(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다), 먼지만 쌓여가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재미있었다.


최근 번역본을 사 본 사람은 위의 책표지가 생소할 것이다. 예문에서 나온, 전설의 레어 아이템이 된 책이다. 글씨는 요즈음 나오는 책에 비해 작은 편이고 한 권의 분량이 대략 400여 쪽이다. 총 3권이다. 번역은 깔끔한 편이다.

[반지 전쟁]은 환상소설이지만, 이야기 틀은 모험소설이다. 절대 반지를 파괴시키려는 반지 원정대의 험난한 여행길. 그 여행길에 마법사, 호비트, 인간, 난쟁이, 요정이 동참한다. 이 중 호비트가 절대 반지를 지니고 있다. 호비트는 이들 중에서 가장 힘이 약하다. 소심하고 변화를 싫어한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길 즐긴다. 왜 가장 자격이 없어 보이는 호비트가 절대 반지를 지니고 있는가.

절대 반지는 권력 욕구를 상징한다. 반지는 이야기의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핵심 주제를 상징한다. 작가 톨킨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그 반지로 축약했다. 반지가 그 소유자를 지배한다. 권력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간계에서 반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는 봄바딜이다. 그는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숲과 물과 산을 즐기는 은둔자다.

중간계라는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작가는 현실 도피를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는다. 소설에서 마법사 갠달프(작가)가 말한다. "시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야."(1권 54쪽) 그는 소설에서 악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강조한다. 희망을 상황이 아니라 의지로 표현한다.

[반지 전쟁]이 시장의 싸구려 환상 소설들과 격이 다른 건 그래서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작가 정신이 있는 건 드물다. 사람들은 톨킨의 이런 진지한 역사 의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실 도피를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물건을 산다.

다들 절대 반지를 소유하려고 안달이다. 올해 한국에는 그런 사람들로 넘친다. 대통령이라는 절대 반지를 차지하려고 똑똑하고 힘있는 자들이 아귀다툼을 한다. 톨킨은 역사를 움직이는 건 그런 자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건 사실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강자들의 눈이 다른 곳에 닿고 있는 동안 작은 손들은 바로 자신들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1권 326쪽)

밑줄 긋기
약속이란 원래 신성한 것인 법, 옛날부터 사악한 인간을 제외해 놓고는 어느 누구도 감히 약속을 어기려 하지 않았다. (1권 14쪽)

갠달프 : "시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야." (1권 54쪽)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며, 모든 방랑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벼려질 것이며, 잃어 버린 왕관을 다시 찾을 것이다. (1권 206쪽)

갠달프 : "절망이나 어리석음이라고요? 절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망이란 의심할 바 없는 끝장을 바라보는 이에게만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을 검토해 본 뒤 남는 필연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입니다. 거짓된 희망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우둔하게 보이겠지요. 좋습니다. 우리의 겉모습, 적의 눈에 보이는 가면은 어리석음이라 합시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현명하니까 자신의 악의 저울로 모든 일을 정확하게 측정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척도는 욕망, 오직 권력에의 욕망뿐입니다. 그는 타인의 생각을 모두 그런 척도로 판단합니다. 어느 누가 반지를 거부한다거나, 우리가 그 반지를 파괴하리라는 것은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반지를 파괴하려고 한다면 그는 일단 논외로 쳐도 좋을 것입니다." (1권 325쪽)

엘론드 :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지요. 하지만 강한 자나 지혜로운 이는 그 길을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은 강한만큼의 희망을 가진 약한 이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건 사실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강자들의 눈이 다른 곳에 닿고 있는 동안 작은 손들은 바로 자신들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1권 325~326쪽)

2002.1.17

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황금가지

나는 한기찬의 번역을 좋아한다. 원문과 대조해 볼 마음은 없다. 그냥 좋다. 

그래도 역시 몇몇 단어는 얘길 안 할 수 없겠다. 중간계가 아니라 중원이라고 썼고 절대반지가 아니라 유일반지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하지만, 황금가지 번역본을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 취향이지 객관적으로 훌륭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국내 번역본의 역사는 http://blog.naver.com/waitmorning/60089701334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황금가지 번역본이 국내 최초 완역판이란다. 번역 관련 사항도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니 가서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총 6권이고 부록은 4, 5, 6권에 흩어져 있으며 샤이어 지도는 1권에 있다.

황금가지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호빗'이 어린이 독자용 책이었다면 '반지의 제왕'은 어른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기본적으로 문체의 변화는 없다 할 수 있으나 이야기를 하는 투는 확연히 다르다. '호빗'은 할아버지가 손자들한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고, '반지의 제왕'은 역사가가 일반 독자들한테 역사를 들려주는 식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서 와서는 이야기 세계를 확장시켜 중간계의 역사와 종족에 대해서 자세히 쓰고 있다. 이에 따라 다루는 지도의 범위도 어머어마하게 커지고 호빗이 사는 마을도 더욱 세세하게 표시되었다. 역사, 족보, 지도는 부록으로 수록해 놓았다.

이로써 '반지의 제왕'은 어린이 오락물로 간단하게 썼던 옛날 이야기에서 중간계라는 가상 세계를 다루는 복잡다단한 거대 서사물로 변했다. 마치 성경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가면서 구세주가 나타나듯, '호빗'에서 '반지의 제왕'으로 가면서 판타지의 전범이 된다.

세련된 유머가 돋보인다. 작가의 문체에 품격이 있다.

부록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진절머리가 난다. 이렇게까지 세상을 창조할 잉여력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미친... 미친... 미친...

1회독 : 20150530 ~ 20150611

반지의 제왕 보급판 세트 - 전7권 (반양장) - 10점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

반지의 제왕 세트 - 전3권 (양장) - 10점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번.김보원.이미애 옮김, 앨런 리 그림/씨앗을뿌리는사람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은 씨앗을뿌리는사람에서 펴낸 책이다. 번역자들은 예전 예문 출판사와 같다.

이 책은 읽지 않았다. 어떤가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훑어봤는데, 양장본이 기대보다 실망스러웠다. 양장본인데 종이질이 왜 그리 좋지 않은지. 게다가 컬러 삽화는 내 취향이 아니다. 반양장에는 삽화가 없다. 7권에는 부록만 있다.

전자책으로 구입한 지는 꽤 되었는데, 정작 완독은 이제서야 했다. 절판이 되어서야.

원서로도 번역서로도 읽기에는 참 지루하다. 이야기 전개 자체는 흥미롭지만, 종종 나오는 시와 건물 지리 여행 묘사는 아무래도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기에 자꾸만 건너뛰려고 했다.

이야기의 주된 정서와 결말은 영웅들의 사라짐이다.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 다시 올 수 없는 영광의 시대.

중간계는 인간이 주로 사는 시대가 되고 다른 종족들은 중간계를 떠나거나 사라진다.

후반부 호빗 해방 전쟁에서는 공산주의 사회가 연상되던데... 온갖 규칙과 갑질로 점철된 자본주의 사회도 떠오르긴 하더라.

2021년 7월 17일 전자책으로 완독.


영화와 소설의 차이
반지의 제왕 : 확장판 박스세트 (6disc)
피터 잭슨 감독, 이안 맥켈런 외 출연/워너브라더스

영화 '반지의 제왕'을 확장판으로 다 봤다. 정말이지 징허게 길다. 영화는 길어도 1시간 30분에 끝냈는 게 맞다. 이런 식으로 길어서야 화장실도 못 가고 뭐냔 말이지.

영화는 대체로 원작 소설을 살린 편이나 역시 책과는 달랐다. 가장 다른 점이라면, 절대 반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 톰 봄바딜이다. 영화에는 이 인물이 아예 안 나온다. 이야기 초반부에 등장하는, 아주 희안한 존재다.

또 마지막에 고향으로 귀환한 후 전투가 있다. 이건 영화에 아예 안 나온다.

영화는 긴박하게 사건과 사건을 이어가지만, 소설은 천천히 진행한다. 

영화에서는 생일 잔치를 치르자마자 주인공 프로도가 마을을 떠나지만, 소설에서는 세월이 흘러흘러 나이가 오십이 되서야 출발한다. 빌보 111회 생일 당시 프로도의 나이는 33세였다. 빌보와 프로도는 생일이 같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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