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장석
월키 콜린즈 지음
강봉식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추리소설을 이것저것 읽다보면 장르 규칙을 어기는, 희안한 일이 생길 때가 있다. 읽는 내내 범인도 범행수법도 그다지 궁금하지가 않다. 추리소설인데 그렇다. 이상하지 않은가. 직접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내 말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작품 내내 풍기는 유머 감각이 독특해서 좀처럼 잊히지 않을 지경이라서, 추리소설다운 긴장감과 호기심을 누그러뜨리고 만다. 피터 러브시의 '가짜 경감 듀'가 그랬고, 윌키 콜린스의 '월장석'이 그렇다. 이번에 무려 사흘 동안 681쪽을 읽어낸,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너무 길다. 별종 추리소설이다.
나도 그랬고 추리소설 애독자들이 그렇듯, 동서미스터리북스를 섭렵하려고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나란히 길게 늘어선 책등을 보면 08번 월장석이 눈에 띈다. 제일 두꺼운 데다가 번호순에서 비교적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DMB를 안 읽는 사람도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작가와 그 작품으로 윌키 콜린즈의 '월장석'을 피할 수 없다. 추리소설 서평 모음집 '죽이는 책'에도 비교적 앞쪽에서 언급한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맺음말이라니. 안 읽을 수 있으랴.
"이 소설은 문학사에서 각주 이상의 존재감을 지닌다. '월장석'은 첫 출간 이래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급진적이고 도전적이며 뛰어나게 재미있는, 당신이 아직까지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읽어볼 만한 그런 책이다. 그리고 이미 읽었다면, 재독의 즐거움에 기꺼이 몸을 맡기시길." (죽이는 책, 55쪽)
서평은 본래 광고다. 글의 목적이 이 책이 읽으라는 거다. 위 서평은 과장된 표현이다. '월장석'을 읽은 독자, 특히 추리소설을 많이 읽는 고수들한테 이 소설의 트릭은 말도 안 되고 독자에게 정당한 추리 게임도 제공하지 않으니 별로라 할밖에 없다. 그러니 급진적이니 도전적이니 하는 수식어는 빛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고조할아버지로서 품격과 재능을 보여준다. 차근차근 관찰과 증거물에 의한 수사로 용의자의 폭을 줄이고, 1년 후에 사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탐정의 설명을 들어야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밀실이 아니지만 보석 도둑 용의자를 집 안에 있는 사람들로 한정시키는 설정이고, 여러 단서를 제공하고 이를 풀어나간다. 범인을 잡으려는 사람이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을 만들어 보이는 솜씨는, 양손 엄지 손가락을 안 들어 올릴 수 없다.
추리소설의 할아버지 할머니로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를 드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으리라 본다. 자, 그렇다면 이 둘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추리소설 쓰는 기법을 배웠단 말인가. 스스로 알아서 만들어냈단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누군가의 작품에서 배웠고 잘 가져다 써먹었다.
하여, 여기 진실로 말하거니와, 애드거 앨런 포가 없었다면 도일의 홈즈도 없었을 것이고 윌키 콜린즈가 없었다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도 없었을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들은 치열하게 선배 작품을 읽고 연구하고 발전시켰음을 확인하는 순간, 경외감에 몸을 떤다. 그런 의미에서 '월장석'은 추리소설 독자보다는 추리소설 작가가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윌키 콜린스의 '월장석'을 읽으면 읽을수록 애거서 크리스티의 첫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이 떠오른다. 콜린스가 추리소설의 틀거리를 어느 정도 확립했다.
소설 '월장석'은 표면적으로는 보석도둑 잡는 범죄추리소설이지만 큰 배경 그림은 로맨스소설이다. 후반부에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만 비교적 간략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추리소설이지만 나름 로맨스소설과 인물풍자소설을 겸해서 재미있게 읽힌다. 읽는 재미의 초점이 엉뚱하게 잡혀버린다. 베털레지 집사의 '로빈스 크루소'교와 기독교 광신자 클라크 양의 전도에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특히, 가브리엘 베털레지의 구수한 입담과 순박한 농담은 도저히 잊을 수 없으리만큼 인상적이다. 읽는 순간 읽기를 멈출 수 없고 읽고나면 또 읽고 싶고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되리라.
소설 '월정석'이 미스터리라기보단 코미디인 이유는 말하는 사람의 개성을 풍자적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돌아가며 1인칭으로 말하면서 말하는 이의 가치관이 그대로 들어난다.
오탈자가 종종 보이고 주어가 잘못 표기된 것이 한 번 있었다. 하지만 읽는 데 곤란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 언제나 그렇듯 동서미스터리북스 DMB의 미스터리다. 읽을 만하다.
그래도 이 작품을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해 주었으면 좋겠다. 엘릭시르에서 해주면 좀 좋은가 말이다.
원서랑 비교해 보니, 번역이 썩 좋다고 할 순 없겠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고 나름 최선을 다한 듯하다. 하지만 영미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그냥 자기 맘대로 의역하거나 짐작으로 번역한 부분도 종종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고 영미권 문화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 사전만으로 번역하는 데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이다. 번역자 경력에 일본 유학이 있는데, 설마 일어번역본 중역은 아니겠지.
Fiddlesticks! 바이올린 활? "말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이런 뜻이다. 바이올린 활만으로는 연주가 안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데없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런 언어표현으로 쓰고 있다. 이같은 사항이 영한 사전에는 안 나온다! 번역자는 이를 "몰라요."라고 번역하고 뒤에 하는 말도 자기 맘대로 애인이 생겼나 보다라고 꾸며냈다. 원서에는 전혀 없는 말이다.
'소설 > 추리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르주 심농 [13의 비밀] 퀴즈식 추리소설 13편 모음 (0) | 2022.03.08 |
---|---|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돈 때문에 쓴 추리소설 (0) | 2022.03.08 |
카트린 아를레 [지푸라기 여자] 독자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만들기 (0) | 2022.03.08 |
나이오 마시 [죽음의 전주곡] 양파 광시곡 (0) | 2022.03.08 |
[유령 호텔] 윌리엄 윌키 콜린스 - 고딕소설 분위기의 범죄 미스터리 (0) | 2022.03.08 |
[노랑방의 수수께끼; 노란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 밀실 트릭의 고전 (0) | 2022.03.02 |
히가시노 게이고 [수상한 사람들] 미스터리의 기본에 충실한 단편 모음집 (0) | 2022.02.27 |
프레드릭 브라운 [교환살인] 성의 없는 결말 (0) | 2022.02.22 |
시릴 헤어 [영국식 살인] 영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살인 (0) | 2022.02.22 |
세계 3대 추리소설을 대체할, 내 맘대로 3대 추리소설 추천 (0) | 2022.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