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린위탕
범우사
2011.04.25.
이로서, [생활의 발견]을 세 번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사랑했다. 이제 이 책을 더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책은 그대로다. 다만, 내가 변했다. 세상도 많이 변했다. 임어당의 여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여유와는 딴 판이다. 일하지 못해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들한테 여유는 지옥이다. 지옥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 관한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 두 가지. 첫째, 범우사의 번역본에는 틀린 글자와 빠진 글자가 많다. 읽는 흐름을 방해할 정도다. 틀린 글자가 이렇게 많은 책을 읽어 보긴 오랜만이다. 반갑다. 둘째, 완역본이다. 다른 번역본에 빠져 있던 [명료자유]편을 번역해 놓았다.
밑줄을 긋지 않으며 읽었다. 예전에는 사소한 글귀 하나하나를 내 감정선과 일치하면 밑줄을 그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예전에 그었던 밑줄을 다시 떠올리니 어리둥절했다. 사소하고 평범한 문장인데, 내가 왜 여기에 밑줄을 그었을까. 이미 그 밑줄은 내게 흡수되어 온 몸에 퍼져 있는 탓에 익숙해 있어서 그런 듯하다. 이 책은 내 몸에 저장되어 있다.
이 책은 옛날 책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세계는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제국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서로 싸우고 미워했다. 개인의 행복을 논하기에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국가를 위한 충성이 강요되고 있었다. 그런 현실에서, 중국인 임어당은 개인주의 철학을 내세우면 여유를 이야기한다. 우스개를 여기저기 뿌려 놓으면서. 임어당은 이런 책을 쓸 게 아니라, 전쟁터에서 자신의 조국 중국을 위해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서 일본놈을 하나라도 더 쏴 죽여 버려야 현실적인 거 아닌가. 세상은 전쟁으로 소란스러운데, 한가롭게 옛 중국문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가롭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다니.
글을 쓰는 사람은 행동하기보단 생각하는 쪽이다. 정확히 말해, 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턱대고 행동부터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부터 한다. 현실을 생각해 보고 미래를 꿈꾸는 사람만이 글을 쓴다. 현실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당장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행동한다.
[생활의 발견]에는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가 차분하고 우스꽝스러운 어투로 적혀 있다. 임어당은 총을 쏘기보단 차라리 비웃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552쪽)을 읽어 보면, 글쓴이가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일시적인 발광이라고 여긴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끌어 안으면서 미래를 본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 본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정신력에 신뢰의 뜻을 표한다. 그것은 본시 한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모한 유럽 운전사의 지능보다는 무한히 높은 그 무엇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번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때가 오리라. 인류는 머지않아 정리 위에 서서 사물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다." (552쪽)
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작가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을 믿고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200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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