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
사진가, 특히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은 종종 간첩으로 오해를 받는다. 다른 사진가의 글에서는 그 사실이 간단한 몇 줄로 나오지만, 김영갑의 회고록에는 자세히 나온다.
사진에 미쳐서 홀로 살면 빨갱이? 이게 말이 되나. 김영갑의 주인집 할머니 과거 경험으로는 그게 절대 진리다. 육이오 전쟁의 기억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할머니, 이 여자는 착한 남자를 계속 빨갱이 빨갱이 빨갱이 이름 붙이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때린다. 김영갑이 할머니의 과거를 이해하고 열심히 화해를 청하지만 죄다 소용없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 경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이 바뀌었는데도 그렇다. 과거를 계속 끌어다가 현실을 해석한다. 결국, 사진가는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로 떨어지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김영갑은 자신을 간첩으로 신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경찰에 수시로 잡혀들어가서 조사를 받았다. 예민한 예술가한테는 치명적인 상처였으리라.
아쉽게도,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질 못했다. 글에 담긴, 사람들의 추악함에 치를 떠느라 평화로운 풍경 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김영갑의 억울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하는데, 단지 당신들의 과거 경험으로 구축한 선입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렇게 괴롭히다니.
사진만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이토록 평화로운 사진을 찍은 예술가의 치열한 삶을 떼어 놓는다면 그의 예술혼을 외면하는 일이겠지.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박해를 견디고 이토록 평화로운 사진을 찍었다. 외로움과 가난조차 사진에 대한 열정을 없애진 못했다.
"나도 당신처럼 외롭다.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 세상은 아름답다.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면 세상은 우리 마음속의 내면 풍경이다." 김영갑의 글과 사진이 그렇게 속삭인다.
삶이란, 고통이란, 그저 잠시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순간이다. 그 절정의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 우리를 위로한다.
[밑줄 긋기]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죽고 싶다 해서 쉽사리 죽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희망의 끈을 나는 놓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 밖의 세계를 나는 믿는다.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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