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Die Ethik (1677)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서광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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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고 무한한 신에 대한 사랑
신은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이다

동양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사상가는 이탁오였다. 그럼 서양에서 욕사발을 가장 많이 들이켜야만 했던 철학자는 누구인가? 바로 바루흐 스피노자였다. 이 둘은 추방당하고 자신이 쓴 책이 금서로 묶이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이들이 한 일은 집 안에 앉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썼을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상이 기존 권력 세력의 질서에 대항한다는 점이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은 땅 속에 묻힌 관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존경받는 인물이 그가 단지 다르게 생각하고 위선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국가를 반역한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국가에게 이보다 더한 불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왜 스피노자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나? 그의 철학 체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스피노자(1632-1677)의 대표작, 에티카. 본래 제목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형이상학으로 시작해서 존재론을 논하며 인식론을 거쳐 윤리학에 이른다. 그리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일원론자다.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은 신이다. "동일한 본성을 소유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는 않는다." 그 실체가 신이다. 그것만이 무한하고 영원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신의 힘에 의존한다." 정신과 물체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신의 변용이다. 주의! 사람들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바보다. 

다시 말해, 실체의 변형과 실체 자체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혼동하는 사람은 신에게 쉽사리 인간의 정서를 부여한다." 또 신의 능력을 왕의 능력이나 권능으로 착각한다. 자, 여기서 스피노자가 그 당시 기독교 사상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열정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인격신은 엉터리다. 왜냐하면, 신은 육체도 정신도 아니며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논리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은 신의 목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을 모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성립되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 인간 정신의 대상은 오직 존재하는 신체일 뿐이다. 

이래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덕은 단순하다. 덕의 기초는 각자가 자신의 유(有)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공자처럼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한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인식론으로 접어든다. 사람들은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왜 그리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보는가. 그것은 사물을 지성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을 세 종류로 나눈다. 첫째, 감각이나 기호를 통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표상한다. 둘째,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 공통 관념을 소유한다. 이것을 이성의 인식이라 부른다. 

셋째, 직관지(直觀知)다. 참된 인식은 두 번째와 세 번째다. 감각은 사물을 우연으로 고찰한다. 이성은 사물을 필연으로 고찰한다. 사람은 열정에 복종하여 자신의 본성을 잃기 쉽다. 열정적인 정서에 예속당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하다. 참다운 덕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고 행복하다.

스피노자는 여러 가지 정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 기쁨, 슬픔, 욕망. 다른 여러 종류는 이 세 가지의 변형이다. 예를 들어, 희망이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기쁨이다. 자기 만족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기쁨은 직접적으로는 악이 아니고 선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슬픔은 직접적으로 악이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이, 다른 사정이 같을 경우,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하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요약하자. "정신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특히 염두에 두며, 따라서 그가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불경스럽고 혐오스럽거나 옳지 않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것은 사물 자체를 전도되고 훼손되게 그리고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데에서 생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다운 인식의 장애들, 즉 미움, 분노, 질투, 조롱, 오만과 우리들이 앞에서 주의한 여러 가지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이 이미 말한 것처럼 가능한 한 선하게 행동하며 즐거워하려고 하는 일에 노력한다."

사람의 기쁨 중에 가장 큰 것은 신을 인식하는 일이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이는 직관지(直觀知)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

영원하고 무한한 그 무엇에 심취한 적이 있는가. 그것을 느끼거나 깨달은 자는 많지 않다.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이유를 말해 주는 듯하다. '철학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쓴다. "이제 여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는 있다. 또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이 분명하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보통 "사람들은 돈의 관념을 원인으로 동반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기쁨도 거의 표상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 있었다. 영원하고도 무한한 자유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유태인 공동체에서 추방되어도 이교도로 무신론자로 낙인찍혀도 자신의 사상을 지켰다. 홀로 살며 렌즈를 연마하여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했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 교수 초빙 제의를 사상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정중히 거절한다. 이처럼 인간의 위대한 정신은 세속의 욕망을 초월한다. 바루흐 스피노자, 그의 고독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에티카'로 오늘날까지 전한다.

1998.11.21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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