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의 약속
조르주 심농 | 열린책들

팜므파탈


'네덜란드 살인 사건'에서는 어장 관리 하는 매력적인 여성을 그려냈다면, '선원의 약속'에서는 성적 매력이 넘쳐서 주변 남자들을 완전히 정신이 나가게 할 정도의 여자를 그려낸다. '교차로의 밤'에서도 나오긴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치명적인 여자, 남자를 파괴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 팜므파탈이다. 그런 여자한테 정신이 팔려서 자기 파멸에 들어선 자의 고백은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은 다음에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해 못 하시겠어요? 전 미쳤었어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곳은 다른 세상이었어요... 여기 돌아온 후에야 깨달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 검은 선실이 있었고... 사람들이 주변을 맴돌았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죠. 제겐 그게 제 삶의 모든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가 '내 큰 아기'라고 속삭이는 걸 다시 듣고 싶었어요..."

원양어선에 팜므파탈을 배에 숨긴 선장. 그리고 이를 알아차린 몇 선원. 그들 사이의 질투와 광란. 여기서 플러스 원이 되는 숨겨진, 혹은 침묵해야만 하는 비극.

추리는, 매그레 반장의 머릿속 당시 상황 재현은 망망대해 선상에서 여자 하나를 놓고 서로 질투하는 남자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뭔가 하나가 빠진 것이다. 그런 질투 정도로 자살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선장의 죽음 또한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남은 하나의 조각 그림을 찾아내 맞추고 사건은 해명되어 종결된다.

일 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아무래도 처음 읽었을 때만큼 재미를 느끼긴 어려웠다. 추리소설 속성상 어쩔 수 없으리라.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아는 상태에서 읽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각 인물을 심리적으로 정확히 그려내는 글 솜씨는, 한 번 읽고 버리는 소설 장르에서는 과분해 보인다.

재미있는 추리소설 읽으려다가 씁쓸한 인생 드라마 한 편 읽게 된다.

참고로, 제목 '선원의 약속'은 술집 이름이다.

선상 질투극


추리소설에서는 독자를 혼란시키거나 범죄의 진상을 맞추지 못하게 시선을 다른 데로 끌어야 한다. 미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흔해 빠진 수법이고 남자들을 파멸로 이끌 정도로 매혹적인 여자, 팜파탈이 등장하는 것은 진부한 클리셰다.

이 소설의 사건 전반에 드러나는 것은 배에 숨어 탄 '치명적인 여자'가 화근이 되어 남자 선원들이 서로 다투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매그레는 눈에 띄는 것이 아닌 숨어있는 사연을 캐기 위해 고심한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 '사실상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지만 물리적으로 죽인 건 아니군.'이었다. 양심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죽였다고 할 순 없다. 사람 욕망이라는 게 단순하지 않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감정은 단지 질투였을까.

바람둥이 여자를 육지에서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지만 바다 위 고립된 섬인 배에서, 게다가 작은 배이고 승선 인원이 몇 안 되면, 남자들은 그 여자한테 미쳐 버리기 마련이다. 배에서 내려서도 욕망은 멈출 줄 몰랐고 이내 사악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허나, 이도 잠시였다. 여자는 다른 남자랑 눈이 맞아 떠나 버린다.

일상의 평온함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저 깊숙한 곳에는 악마 같은 욕망이 억눌려 있지 않을까. 소설 마지막에 그런 욕망조차 세월 지나면 사라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매그레 역시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선상 미스터리? 선상 질투극이었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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