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지음
박기순 옮김/민음사


질 들뢰즈, 그가 1995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살했을 때, 언론에서 떠들썩했던 게 기억난다. 철학자가 자살을? 자살한 소설가의 소설책을 읽는 데는 거부감이 없지만, 자살한 철학자의 책을 읽는 것은 영 꺼림칙하다.

스피노자는 삶의 철학자다. 들뢰즈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니체에 앞서 삶을 위조하는 모든 것들, 우리가 삶을 폄하할 때 의거하게 되는 모든 가치들을 고발한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는,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삶과 유사한 어떤 것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피하기만을 꿈꾸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삶은 죽음에 대한 숭배라는 것을 주장하는 모든 가치들을 고발한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의 철학을 단순히 범신론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엔 그 생각이 무신론으로 이어진 듯하다. 특히, 현대 철학자들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가 우월한 현실 상황에서 스피노자를 그렇게 보는데, 이는 순전히 자신이 믿는 것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끌어들인 해석이지 스피노자의 철학은 아니다. 바루흐 스피노자는 명확한 인식으로 신을 만나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는 신본주의자다. 인본주의로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지 마라.

스피노자는 비도덕론자가 아니다. 기존의 가식적이고 폭력적인 도덕을 거부했을 뿐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멋지게 풀어놓았다. 흔히 도덕은 선과 악을 전제로 상과 벌로 사람의 삶을 억압한다. 스피노자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사과 이야기'를 통해 이를 고발한다.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이 있다."

"이해해야 할 것을 명령과 혼동하고 인식을 복종과 혼동하며 존재를 당위와 혼동하는 오랜 오류의 역사가 존재한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

서구 기독교 사상의 죄의식, 선과 악의 대립적 가치 법칙으로 삶을 억누르는 그런 도덕을, 스피노자는 허용치 않는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한 윤리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인위적 법칙이 아니라 각 개인의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는 정신(영혼)과 물질(육체)을 구별하여, 자아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찬성치 않았다. "정신과 신체 사이의 실질적인 인과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이 해석은 정확하다. 스피노자에게 유일한 실체는 신이기에, 정신과 물질은 신의 변용이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함을 인정치 않았다. 정신에 대한 물질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요즘과는 다르다.

스피노자가 우리한테 많은 영감을 주는 이유는 뭘까. 당장 떠오르는 것은, 현대 물질 문명에 반성적 사고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인식이라는 데카르트와 근대 시대의 공통되는 면이 있었으나, 가는 길을 완전히 달랐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의식을 중시하였기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시켰다. 스피노자는 신, 인간의 정신(영혼)과 육체를 소중히 여겼기에, 인간은 자연(신)의 한 부분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삶, 신, 우주를 포옹한다.

그 어떤 인습이나 제도에 꺾이지 않고 사유의 자유를 끝까지 밀어붙였기에, 교수직마저 사양해 버리고 렌즈 세공으로 혼자 생계를 유지하며 홀로 진리에 열중했던 바루흐 스피노자. 삶과 우주와 신에 대한 열정이 불꽃처럼 분명하고 압축된 형태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철학. 그의 책은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불멸의 불꽃으로 영원히 읽혀지라.

1999.7.18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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