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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9.20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기사도] 독일 고성에서 연쇄 살인
  3. 2024.09.18 아인랜드 [파운틴 헤드 / 마천루] 이상주의자를 위한 찬가
  4. 2024.09.18 밀른 [빨강집의 수수께끼 붉은 저택의 비밀] 밀실살인, 비밀 통로
  5. 2024.09.15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운동회] 단편소설 모음집 총 6편
  6. 2024.09.15 윌리엄 아이리시 [환상의 여인] 세계 3대 추리소설
  7. 2024.09.10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공포관] 불성실한 결말
  8. 2024.09.08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사랑의 도피]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9. 2024.09.03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랩소디] 콩쿠르 연쇄 살인
  10. 2024.09.01 아카가와 지로 [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상상과 현실의 마누라 죽이기
  11. 2024.08.28 아카가와 지로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괴담] 고양이 귀신 오컬트 미스터리
  12. 2024.08.24 엘러리 퀸 [신의 등불] 트릭의 비밀을 밝히는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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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2024.08.01 이가라시 리쓰토 [법정유희] 법정물 형식의 정교한 미스터리

에티카
Die Ethik (1677)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서광사 | 1990년 10월
5점 ★★★★★ 끝내줍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신에 대한 사랑
신은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이다

동양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사상가는 이탁오였다. 그럼 서양에서 욕사발을 가장 많이 들이켜야만 했던 철학자는 누구인가? 바로 바루흐 스피노자였다. 이 둘은 추방당하고 자신이 쓴 책이 금서로 묶이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이들이 한 일은 집 안에 앉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썼을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상이 기존 권력 세력의 질서에 대항한다는 점이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은 땅 속에 묻힌 관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존경받는 인물이 그가 단지 다르게 생각하고 위선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국가를 반역한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국가에게 이보다 더한 불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왜 스피노자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나? 그의 철학 체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스피노자(1632-1677)의 대표작, 에티카. 본래 제목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형이상학으로 시작해서 존재론을 논하며 인식론을 거쳐 윤리학에 이른다. 그리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일원론자다.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은 신이다. "동일한 본성을 소유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는 않는다." 그 실체가 신이다. 그것만이 무한하고 영원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신의 힘에 의존한다." 정신과 물체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신의 변용이다. 주의! 사람들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바보다. 

다시 말해, 실체의 변형과 실체 자체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혼동하는 사람은 신에게 쉽사리 인간의 정서를 부여한다." 또 신의 능력을 왕의 능력이나 권능으로 착각한다. 자, 여기서 스피노자가 그 당시 기독교 사상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열정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인격신은 엉터리다. 왜냐하면, 신은 육체도 정신도 아니며 모든 것의 존재 원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논리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은 신의 목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을 모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성립되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 인간 정신의 대상은 오직 존재하는 신체일 뿐이다. 

이래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덕은 단순하다. 덕의 기초는 각자가 자신의 유(有)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공자처럼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한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인식론으로 접어든다. 사람들은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왜 그리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보는가. 그것은 사물을 지성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을 세 종류로 나눈다. 첫째, 감각이나 기호를 통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표상한다. 둘째,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 공통 관념을 소유한다. 이것을 이성의 인식이라 부른다. 

셋째, 직관지(直觀知)다. 참된 인식은 두 번째와 세 번째다. 감각은 사물을 우연으로 고찰한다. 이성은 사물을 필연으로 고찰한다. 사람은 열정에 복종하여 자신의 본성을 잃기 쉽다. 열정적인 정서에 예속당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하다. 참다운 덕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상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고 행복하다.

스피노자는 여러 가지 정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 기쁨, 슬픔, 욕망. 다른 여러 종류는 이 세 가지의 변형이다. 예를 들어, 희망이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기쁨이다. 자기 만족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기쁨은 직접적으로는 악이 아니고 선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슬픔은 직접적으로 악이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이, 다른 사정이 같을 경우,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하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요약하자. "정신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특히 염두에 두며, 따라서 그가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과 불경스럽고 혐오스럽거나 옳지 않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것은 사물 자체를 전도되고 훼손되게 그리고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데에서 생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다운 인식의 장애들, 즉 미움, 분노, 질투, 조롱, 오만과 우리들이 앞에서 주의한 여러 가지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이 이미 말한 것처럼 가능한 한 선하게 행동하며 즐거워하려고 하는 일에 노력한다."

사람의 기쁨 중에 가장 큰 것은 신을 인식하는 일이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이는 직관지(直觀知)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

영원하고 무한한 그 무엇에 심취한 적이 있는가. 그것을 느끼거나 깨달은 자는 많지 않다.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이유를 말해 주는 듯하다. '철학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쓴다. "이제 여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는 있다. 또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이 분명하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보통 "사람들은 돈의 관념을 원인으로 동반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기쁨도 거의 표상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 있었다. 영원하고도 무한한 자유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유태인 공동체에서 추방되어도 이교도로 무신론자로 낙인찍혀도 자신의 사상을 지켰다. 홀로 살며 렌즈를 연마하여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했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 교수 초빙 제의를 사상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정중히 거절한다. 이처럼 인간의 위대한 정신은 세속의 욕망을 초월한다. 바루흐 스피노자, 그의 고독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에티카'로 오늘날까지 전한다.

199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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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기사도
三毛猫ホ-ムズの騎士道 (1986)

아카가와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씨엘북스 / 2012년 6월

4점 ★★★★ 
괜찮네요

독일의 고성에서 아이언 메이든으로 죽음을 당한 신부. 남편은 용의자들을 성으로 불러들이고 홈즈 수사단(3명 + 1마리)을 초대해서 조사하게 한다. 

조사를 의뢰하며 복수를 결심한 남편은 실종된다. 이후 남편은 모인 용의자를 한 명씩 살해하려는 것 같다. 해자에 한 사람이 빠져 죽는다. 

성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불안에 떤다. 짙은 안개 속에 성 안에서 숨바꼭질 분위기다. 

삼색털 고양히 홈즈 시리즈의 전통에 따라, 이번에도 역시 계속 시체가 나오고 여전히 누가 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는지 알 수 없다. 가타야마의 연애도 나온다.

중간에 용의자 가족의 숨겨진 사연이 밝혀지나 범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용의자의 전부인이 이 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힌트를 남길 뿐이었다.

두 사람이 죽었지만 어쨌거나 종적을 감춘 이 찾기는 계속 된다. 화살 맞아 죽어서 세 사람이 죽었다. 조사를 의뢰한 사람은 여전히 못 찾았다.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 범인과 트릭이 있었다. 범인이 창밖으로 몸을 날려 떨어져 죽는 것은 만화 같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왜?

화살 트릭은 대략 짐작했고 역시나 맞았다.

어쨌거나 해피엔딩. 초반 힌트이자 수수께끼를 풀어주며 끝난다.

쓸데없는 지식 '중세 독일 고성의 내부 구조'를 익혔다

202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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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ntainhead (1943, 1968)
파운틴 헤드 1, 2
아인 랜드 지음
휴머니스 

마천루 1, 2
광장

군사 훈련을 직접 받기 전에, 나는 군대를 이상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군사 단체는 엄격한 규칙으로 가장 효율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는 그 반대였다. 군대에서는 절대 혼자 튀어 나와서는 안 된다. 만약 상사가 "차렷" 구호를 외쳤는데 나를 빼고 모두 열중 쉬어 자세를 취했으면, 나도 빨리 열중 쉬어 자세를 취해야 했다. 모두 모자를 벗고 있는데, 나만 모자를 쓰고 있으면 안 된다. 군대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 개성은 금지다.

이런 군대의 특징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꽤 안정적이다. 그리고 애써 나 혼자서 뭘 생각하거나 혼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직 집단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면 만사가 잘 돌아가는 것이다.

군대의 모습은 직장 사회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직장에서 지나치게 튀는 기획안을 제안하면 그 기획자는 따돌림을 당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꿈과 이상을 쉽게 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주변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이상주의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 이상주의자는 사방에서 공격을 당한다. 인류사를 돌이켜 보면, 위대한 인물은 종종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갈릴레이를 생각해 보라.

[파운틴 헤드 / 마천루], 한 이기적인 이상주의자의 모험담이다. 이 소설은 한 건축가가 모든 사회적 편견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이야기다. 193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이 시기에 미국 맨하턴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이 세워졌다. 그 시기 이전에 그런 마천루를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예전 건축 양식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효율적이지 못한 화려한 장식으로 그 마천루를 꾸미려 들었다. 거기에 반기를 들어 오늘날 현대 건축 양식을 수립하기까지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43년에 나온 책이다. 그럼에도, 지금 읽는 사람들한테까지 꽤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킬 만한, 도발적인 사상을 담은 소설이다. 작가 자신의 사상을 말하기 위해 건축가의 이야기를 썼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설 후반부는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작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논쟁의 핵심은 종교를 포함한 이타주의/인도주의에 대한 질타다. 이 질타에는 개인의 욕망을 무시하는 집단주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옹호는 소수 엘리트가 인류를 이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위험해 보이는 이 사상은 우리가 남의 눈치만 살피고 정작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더구나, 모든 대다수의 편견과 억압과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장은 꽤나 매력적이다.

아인 랜드는 자신의 철학은 "객관주의", 혹은 "이성적인 이기주의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소설 [마천루]의 주인공 하워드 로크가 그 철학의 화신이다. 그는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이상만을 생각한다.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은 독창적이라서, 지나치게 독창적이라서 기존 관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을 밀고 나아간다. 그는 이상과 꿈을 고집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여기에 정반대의 인물이 그와 쌍곡선을 이루며 나타난다. 피터 키딩은 독창성이라고 하나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꿈과 이상이 없는 대신에 현실과 잘 타협한다. 출세 지향적인 인물로, 사회적 성공으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이상도 없는 텅 빈 인간형이다. 반면, 하워드 로크는 실패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꽉 찬 인간이다.

하워드 로크와 피터 키딩이 만들어내는 평행 쌍곡선에 엘스워드 루히가 끼어든다. 그는 기존 관습에 익숙한 대중에 영합하면서 천재적인 사람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언론인이다.

이 소설은 두 권짜리로 모두 900여 쪽이 넘고 빡빡한 글씨에 많은 분량의 책이다. 그럼에도 지루하다고 느낄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 이는 하워드 로크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이상주의자를 위한 찬가의 매력.

지은이는 이 책이 인생의 본성과 인생의 잠재적 가능성을 찾는 이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내 옛날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한때 로크였던 것 같다. 때론 피터 키딩이었다. 현재 내 모습은 하워드 로크도 아니고 피터 키딩도 아니다. 옛날 사진을 보듯, 기쁘면서도 아쉽다. 좀 더 일찍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텐데.

이 소설은 1949년 영화로 나왔다. 개리 쿠퍼가 하워드 로크 역을 맡았다. 책에 드문드문 영화 장면이 흑백 사진으로 끼어 있다.

1988년에 번역이 되어 나온 책이 절판도 품절도 되지 않고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이 소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게 분명하다. 번역 제목은 마천루에서 파운틴 헤드로 바뀌어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영어 원서는 물론 꾸준히 잘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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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집의 수수께끼
The Red House Mystery (1922)
앨런 알렉산더 밀른
동서문화사 2003년 5월

:: 밀실살인과 비밀통로가 등장하는 정통 추리소설 ::

장편 '빨강집의 수수께끼'는 초보자를 위한 추리소설로 좋다. 1922년 발표작인데, 추리소설의 기본을 잘 갖춘 소설이라서 오늘날까지도 '재미있게' 읽힌다. 

아마추어 탐정을 자처하고 나선 주인공과 그의 추리를 들어주겠다고 나선 보조자가 수수께끼 같은 살인의 진상을 밝혀 나아간다. 유머소설풍의 추리소설이다. 진지한 범죄수사가 아니라 즐거운 탐정놀이 분위기다. '곰돌이 푸'로 유명한, 밀른의 따스하고 여유로운 문체가 돋보인다. 소설 초반부터 웃긴다.

밀실살인과 비밀통로. 추리소설 많이 읽는 독자한테는 시시하기 그지없다. 시작부터 트릭을 알아버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너무 낡고 너무 반복해서 쓴 트릭이라서 그렇다. 고전추리소설은 등장인물이 완벽한 연기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 '연기의 신'은 옛날 추리소설에서는 암묵적 동의를 하고 읽어야 한다.

허술하고 헐렁하게 쉽게 쓴 듯 보이나 나름 세심하게 추리한다. 비밀통로의 경우 영화에서 흔해 빠지게 나오는 서재 비밀문이다. 특정 책을 빼거나 그 책 뒤에 문을 여는 장치를 누른다는 식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책이냐이다. 이를 차분하게 상식적으로 풀어내는 솜씨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상식의 소유자라서 맞출 수 있는 추리다. 사람들이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 책이 바로 비밀통로로 가는 책이다.

밀실트릭은 알고나면 허무해서 죽을 지경이 되는 게 보통이다. '노란방의 수수께끼'만큼이나 허무하다. 하지만 뭔가 유별난 장치나 기발한 속임수가 아닌 눈에 뻔히 보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트릭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홈즈처럼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자가 아니라 단지 기억을 잘 하는 편인 보통 사람이 탐정이다.

앨런 밀른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따라하면서 조롱한 후 더 발전시킨다. 이 책 98쪽에서 셜록 홈즈가 하숙집 층계가 몇 개인지 알아맞춰 왓슨을 골리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놀린다. "층계 수를 알고 싶으면 하숙집 아주머니를 불러서 물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나서 주인공 탐정 '길링검'은 놀라운 기억력을 선보인다. 그는 완벽하게 기억한다.

작가는 대놓고 도일의 홈즈 소설을 골려먹는다. "자네의 와이셔츠에 묻은 딸기 얼룩을 보고 자네가 식사 뒤에 딸기를 먹었다고 추리하면 되는 거지? 여어, 홈즈, 자네에게는 완전히 놀랐는걸? 뭘 그래, 내가 늘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97쪽)

밀른이 보기에, 왓슨은 홈즈처럼 멍청이다. 왓슨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듣거나, 귀찮게 질문하거나, 얼간이처럼 비웃음을 받거나, 내가 이미 캐낸 일을 며칠 뒤에야 간산히 발견하고는 기뻐하는"(97쪽) 바보 역을 자처한다.

애석하게도 이 소설의 탐정 길링검은 이번 사건만 활약하고 끝이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 편을 예고하는데도 말이다. "그럼, 잊지 말게나. 그들 중에 누가 살해당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곧 나를 불러주게. 드디어 물이 오른 탐정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할테니!"(275쪽)

작가 밀른은 정확히 자기 능력껏 쓰고 시리즈를 잇지 않았다.

이 책에는 부록으로 단편소설 한 편이 있다. 아서 모리슨의 단편집 '명탐정 마틴 휴이트(Martin Hewitt, Investigator)' 중에 첫 번째 작품인 렌턴관 도난사건 (The Lenton Croft robberies)을 실었다.

보석 도난 사건인데, 아무리 봐도 도저히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세 건의 도난 사건에서 유일한 일관성과 동일성은 사건 현장에 타다 남은 성냥개비가 있다는 사실이다.

힌트를 주는데 주의해서 읽지 않게 되기 마련이라서, 다시 읽고서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일상 사건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상식이나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직업이 의사라고 하면 남자라고 생각한다. 여자 의사도 있다! 외국어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외국어를 잘하고 전공이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대학교에 이과도 있다!

이 단편의 수수께끼로 속이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 자신이다. 자신의 선입견에 스스로 장님이 된다.


붉은 저택의 비밀
블루프린트
전자책

김래경 번역. 표지며 제목은 진지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인데, 실제 본문은 그렇지 않다. 곰돌이 푸의 작가 밀른이 썼는데 애드거 앨런 포 분위기일 순 없지, 아무렴. 뭐 그렇다고 동서문화사의 표지와 제목이 더 낫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참고로, 블루프린트 책에는 동서문화사판에 있는, 작가가 쓴 머리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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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운동회
三毛猫ホ-ムズの運動會 (1987)
아카가와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씨엘북스 / 2012년 3월
3점 ★★★ 무난해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총 여섯 편.

수사단은 가타야마, 하루미, 이시즈, 홈즈, 이렇게 4명이 정규 멤버다.

범죄자의 동기와 살해 방법만 보여주면 추리소설인가. 아, 그랬구나 정도밖에 감흥이 고작이다. 시리즈 1, 2, 3편에서 보여준 솜씨가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대치되는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곧 살인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긴장은 있지만 소설 분위기가 워낙 태평하고 농담하는 식이라서 크진 않았다.

어쨌든 끝까지 읽지 않으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하다.

1.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운동회

범죄자가 때마침 경찰들 운동회 하는 근처에서 탈출해서 자신을 붙았던 형사한테 복수를 시도하는 가운데, 그 형사는 불륜이다. 운동회의 여러 경기를 방어 트릭으로 삼아서 살인을 저지른다.

2.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특종

경찰 미인 대회. 1987년에 나온 책이다. 대회 중 제일 예쁜 사카이 리쓰코가 살해된다. 용의자는 셋이다. 경찰이 되기 이전부터 따라다니며 구애를 했던 쿠보, 미인 대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세키 교코, 수사1과 과장 구리하라.

사건은 두 가지 일이 겹치면서 복잡해 보였던 것이었다. 존 딕슨 카의 향기.

3.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바캉스

불륜으로 시작해서 이혼과 재혼으로 이어간다. 소문으로는, 늙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랑 결혼하기 위해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고용해서 늙은 아내를 불륜에 빠지게 한 후 이혼한다. 

이 모든 당사자들이 한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려고 모여든다. 그리고 관련자들이 서로 살해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아침 일찍 호텔 수영장에 시체가 나온다.

추리만 한다. 반전. 천벌 받았다는 식으로 끝난다.

4.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온천 여행

본의 아니게 소매치기범을 살해한 경찰이 그 범인의 어머니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다. 

온천 여관이 불이 나고 그 경찰과 아내의 둘 중혼 사실이 밝혀진다.

불에 탄 죽은 사람의 정체는 안 밝혀진 가운데, 이번에는 범인의 어머니가 살해 위협을 받는다.

복잡해 보이는데 범인의 자백으로 진실이 밝혀진다. 범죄를 덮기 위한 범죄였다.

5.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전람회

전시회에서 본 그림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갤러리에서 본 그림처럼 가슴이 찔려 죽은 여자.

파티에서 화가는 독살되고 목 매달린 여자 그림이 발견되는데. 화가는 정말로 자기가 그린 그림의 모델들을 살해한 것일까?

독살범을 잡기 위해 그날 파티를 재현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

6.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생일 파티

다음 달 결혼할 예정인 노부코가 누군가한테 찔려 살해당한다. 용의자는 같이 모여 있던 친구들. 모두들 한 남자를 서로 뺏으려 했던 것. 하루미의 생일도 아닌데 초대해서 생일 축하를 해준다?

덧붙임.

일본 경찰 신고 전화번호는 112가 아니라 110이다. 외국소설은 나한테 거의 쓸모가 없는 지식을 가르쳐 준다.

202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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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 Lady (1942)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

환상의 여자
양병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환상의 여인'은 추리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가 피해야할 작품 1순위다. 하지만 이 책이 세계 3대 추리소설 중에 하나로 올려져 있어 안 읽는 사람이 드물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도움말은 하나다. 지나친 기대를 삼가는 것이 좋다.

멋진 미스터리를 바라는 독자에겐 지루하고 허무하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에 감시카메라가 발달한 시대에 이 소설의 설정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된다. 옛날 얘기다. 옛날이니까 그나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여자를 분명히 여러 사람들이 봤는데도, 모조리들 부인하고 나선다. 나 혼자만의 환상인가. 소설 초반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고 신비롭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게 궁금하고 이상해서 끝까지 읽으면 반전이 놀랍다기보다는 허무해서 미쳐버린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긴장 구조를 만들어낸다. 살인 발생. 또 살인. 또 살인. 범인 정체가 밝혀짐. 자신의 살인을 감추기 위해 살인이 연이어 일어난다. 이 소설이 그런 구조에서 다소 특이한 점이라면, 그 환상의 여자를 목격한 사람들을 추적하여 추궁하는 과정에서 살인 혹은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형사 바제스는 스콧 헨더슨을 체포하고 재판에서 사형까지 받아내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적으로 조사단을 꾸린다. 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애인과 친구다! 가장 사랑하는 애인 캐럴 리치먼과 가장 신뢰하는 친구 잭 롬버드.

스콧의 사형집행 일이 가까워 오는데, 결정적인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사고나 살인으로 참으로 절묘한 순간에 죽고만다. 도대체 누가 왜 '환상의 여인'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며, 스콧의 아내를 죽인 살인범은 누구인가?

롬버드는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서 '환상의 여인'이 그날 썼던 요상한 모자를 추적한다. 그 모자는 복제품이었고 그 오리지널은 그날 공연자가 쓰고 있었다. 그 배우한테서 모자 제작자를 알아내고 모자 제작자한테서는 그 복제자를 알아내고 복제자한테서는 그 복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사람을 알아낸다. 아직 안 끝났다. 바로 그 요청자가 그 모자를 줘 버린 여자를 알아낸다. 그 여자가 그 여자다. 플로라. 자, 이제 끝났나? 절대 아니지. 메롱메롱, 멍멍.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고나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독자는 황당한 상황에 처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사형 집행일 당일에서야 가까스로 '환상의 여인'을 잡았다. 달려, 달려. 스콧을 구하자!

추리소설에서 반전을 크게 만들려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을 충실하게 실행하면 된다. 독자의 코앞에 범인과 결정적 힌트를 두고 계속 아닌 척하다가 끝에서 터트린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을 뒤집으면 놀라움은 커지는 법이다. 절대로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가 범인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도 연기의 신 트릭이 나온다. 고전 추리소설들은 이 트릭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애용하는 양식이고 다른 추리소설도 이야기에서 밥 먹듯 쓴다. 그렇게 분장과 연기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아주 쉽게 생각하고 그렇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당연시한다.

이 소설의 매력은 문체다. 도시의 우울한 정서를 독특하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추리소설 독자보다는 개성적인 문장을 선호하는 문학 애호가를 위한 책이다. 문장 스타일 하나만큼은 끝내준다. 경이롭다. 천재다.

시작부터 시처럼 빛처럼 음악처럼 흐르고 펼치며 채색되는 문장이다.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그러나 밤의 공기가 감미로운데도 그의 기분은 씁쓸했다."(양병탁 옮김) 영어 원문을 보면 더욱 그렇다.

"The night was young, and so was he. But the night was sweet, and he was sour." 운율 맞춘 문장.

이 멋진 문체로 쓴 소설이 왜 하필 범죄소설인가. 안타깝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재능이 탁월하지만 왜 이렇게 분위기가 어두운지. 아깝다. 어쩌겠는가. 그저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썼겠지. 간단하고 명료하게 쓴 문장으로 추리소설을 써도 되는데, 휘황찬란하게 눈부신 문체라니. 게다가 너무 장황하다. 문장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좋다.

아이리시의 소설 스타일은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도입부, 암담하고도 우울한 분위기, 흥미롭고 긴장감 높은 상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누아르의 아버지로 불린단다. 많은 작가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셨다.

◆ 독서 기록
1회독 2014.6.3 엘릭시르 종이책
2회독 2015.7.8 동서문화사 전자책

The night was young, and so was he.

밤이 젊다니 무슨 말인가? 
직역해도 대충 의미는 알 수 있어서 
의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The nigh is young. 초저녁이다.
The nigh is still young. 아직 초저녁이야.

관용 표현이다. 시적인 표현을 위해 
일부러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대체로 계속 술 마시러 가자고 할 때 쓴다.
소설에서 주인공 남자가 술 마시러 술집에 들어간다.


의역해 보면 이렇다.
초저녁이었고 그는 젊었다.

운율을 맞춰 쓴 뒤의 문장 때문에 대개들 직역했다. 
초저녁이라고 번역한 곳은 딱 한 군데였다.

5월의 초저녁에 
풍기는 상큼한 공기가 
풋풋한 그의 젊음과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 창 이승원 

이승원은 철저한 의역을 추구했다. 
원문 문장 구조를 무시하고 
뜻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치중했다.

밤은 젊고 그 역시 젊었다. - 엘릭시르 이은선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해문 최운권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동서문화사 양병탁

202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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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공포관
三毛猫ホ-ムズの恐怖館 (1985)
아카가와 지로
씨엘북스 / 2012년
2점 ★★ 에효

임신했던 여고생이 죽었다. 과연 누가 임신을 시켰는가? 누가 칼로 찔렀는가? 임신시키고 칼로 찔렀는가? 용의자는 괴기 동아리 남학생 네 명이다.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 전통에 따라 시체가 계속 쌓여야 하는데, 이번에는 계속 살해 위험이 나타나는 식으로 바꾸었다.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도 탐정/경찰/수사대가 조사한 끝에 범인과 그 수법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어쩌다 보니 의외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식이다. 이 정도까지는 나름 무난한데, 범인을 밝히는 연극이 거의 끝나갈 무렵 편리하게도 갑자기 불이 나고 범인이 그 사고 중에 죽는다. 

작가가 대충 빨리 마무리하는 식이다. 끝이 너무 안 좋다. 시리즈 1편의 그 무시무시한 반전과 과격했던 끝맺음이 시리즈 6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202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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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사랑의 도피
三毛猫ホ-ムズのけ落ち (1981)
아카가와 지로 / 씨엘북스 / 2012년 6월
3점 ★★★ 무난해

::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실적 결말 :: 

시작은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다.

앙숙 집안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고향을 떠나 도망간다. 하지만 도시로 온 두 남녀는 오빠 동생 친구 같은 사이가 되고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우연의 일치로, 두 남녀의 이름이 주인공 남매와 같다. "가타오카 요시타로, 야마나미 하루미니까, 두 사람의 성을 합쳐서 가타야마다." 그리하여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 전통에 따라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려 조사에 착수한다.

186쪽에서 존 딕슨 카의 트릭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 물론 출처는 밝혔다. "딕슨 카라는 사람이 생각했던 트릭입니다." 밀실 트릭의 정체는 맨 끝에서 밝혀지는데, 역시나 무리지 싶은데, 그게 그리 쉽게 깨지는 구멍이 아닌데, 어쨌거나 논리적으로 설명은 되었다. 결국 카의 트릭이 아니었다.

범행 동기는 결국 돈이었다.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의 헛점을 노리고 반전에 성공했다. 내 마음은 씁쓸했지만.

딱히 트릭이 재미있지 않았고 해피엔딩도 아니고 해서, 범인과 수법은 명백하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이야기였다.

202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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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랩소디
三毛猫ホ-ムズの狂死曲 (1981)
아카가와 지로 
씨엘북스 2012년 5월
4점 ★★★★ 괜찮네요

:: 콩쿠르 연쇄 살인 + 노다메 칸타빌레 ::

추리소설 초반 설정을 잘해 놓았다. 가장 잘 알려진, 고립된 섬에 갇히는 식이 아니라 콩쿠르를 고립된 곳에서 한다. 외부와 연락 두절. 전화는 한 대. 휴대폰이 없는 시대고 형사는 호출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한 명씩 죽어나간다. 

살벌한 경연 대회 분위기. 우승을 노리는 본선 진출자 일곱 명 모두가 용의자고 그 주변 사람들도 용의자다. 살인범은 곁에 있는 것 같은데...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의 전통을 계속 이어간다. 형사 여동생이 수사를 개시하고 고양이가 힌트를 주고 가타야마 형사는 미녀랑 사랑에 빠지고 시체는 계속 발견되고 유머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매회 가타야마의 연애는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주요 용의자랑 사랑한다. 그다지 미남도 아닌데 미녀들이 주인공한테 키스하고 거시기하려고 난리도 아니다.

농담도 수수께끼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법의관의 농담이 너무 자주 나온다. 소설 후반부까지 수수께끼는 풀릴 기미가 없다. "뭐가 뭔지 모르겠네." 297쪽. 난로는 왜 있는 것인지? 백과사전은 왜 순서가 엉망으로 꽂혀 있는지?

범인이 자수하는 식으로 끝난다. 수수께끼는 다 푼 상태에서 그리된다.

미스터리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재미는 없었지만 이야기 전반은 좋고 끝도 좋았다. 노다메 칸타빌레 읽은 기분이다. "마리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군." 365쪽. 완독 후,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다. 

20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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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惡妻に捧げるレクイエム (1981)

아카가와 지로
살림 2010년 7월
3점 ★★★ 무난해

마누라 죽이기. 실제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소설, 픽션, 상상, 이야기에서 그러는 것이다 일단은.

네 명이서 한 필명을 써서 글 써서 먹고산다. 각자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식이었다. 문장력, 취재력, 서사력, 묘사력. 기자, 시인,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초반은 읽기에 지루했다. 이야기 전개가 딱히 특별할 것이 없어서 그랬다.

중반 145쪽부터 흥미롭게 된다. "마치 자신이 쓴 창작의 세계가 그대로 현실이 된 듯한..." 일이 벌어진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며 그저 우연인 것인가. 과연 소설로 쓴 것처럼 현실에서도 그렇게 될까.

현실과 상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된다. 하지만 그뿐이다. 딱히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추리소설 수수께끼 미스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흔한 아침 드라마 이야기에 평온한 해피엔딩이다.

문학상 탄 소설이라서 기대했는데, 실망했다.

2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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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괴담
三毛猫ホ-ムズの怪談 (1980)
아카가와 지로
씨엘북스 2012년 5월
4점 ★★★★ 괜찮네요


:: 고양이 귀신 오컬트 미스터리

상 탄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 수준을 높였는데, 그럭저럭이었다. 존 딕슨 카가 쓴 마녀 오컬트 미스터리 '화형 법정'이 기준이었으니 내가 잘못했지.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재를 귀신 고양이로 잡았다. 여전히 홈즈 고양이가 힌트를 주고 시체는 계속 나오고 거의 끝에 가서야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이번에도 형사 가타야마는 여자한테 이용당한다.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괴담'만의 특징이라면 오컬트 요소, 사람으로 변신하는 새하얀 고양이가 나온다는 점이다. 나름 괜찮았다.

"과장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마치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말하다니..." 264쪽. 직장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하리라.

202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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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등불
The Lamp of God (1940)
엘러리 퀸
동서문화사 2003년 중판
4점 ★★★★ 괜찮네요

:: 트릭의 비밀을 밝히는 태양 :: 

엘러리 퀸 중단편집 총9편 수록

-= 신의 등불 : 엘러리 퀸의 유명한 작품이다. 읽어보니, 명불허전이었다.

집 한 채가 갑자기 사라진다. 제목 '신의 등불'은 햇빛이다. 사건 해결의 결정적 힌트다. "태양은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 즉 어둠을 밝혀주는 진정한 신의 등불 노릇을 해준 거요."

트릭은 간단하다. 이 기적 같은 마술 쇼를 위해 들이는 노력이 너무 심해서, 가성비는 떨어진다. 그렇게 똑같이 보일 수 있나. 아무래도 무리지.

해피엔딩. 마음에 들었다. 

-= 보물찾기 : 용의자들한테 보물찾기를 시켜서 진주 목걸이를 어디에 숨겼는지 밝혀낸다. 초반에 길게 한 장소 설명은 복선이며 회수되어 마무리된다. 눈치빠른 독자라면 답은 금방 알 수 있다.

-= 용조각 굄돌의 비밀 : 굄돌이 옥새 같은 거라고 추측했는데, 아니었다. 반전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이 사람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면 수수께끼는 풀리는 것이다.

-= 암흑 집의 모험 : 유원지의 놀이터 암흑 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도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 캄캄한 공간에서 명사수처럼 총을 쏠 수 있는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수수께끼이자 힌트다. 공정한 게임이다. 답을 맞출 수 있도록 단서는 숨기는 거 하나 없이 모두 나와 있다. 화살표 색은 의심할 수밖에 없지.

-= 피 흘리는 초상화 : 제목도 그렇고 이야기 초반부도 그렇고 오컬트 비현실적 분위기인데, 실제 진행과 진상 해명은 현실적이다.

공정한 게임이다. 주요 단서는 명백하게 앞서 제시되어 있다. 심지어 강조되어 있다. 모델의 등 얘기를 지나치게 반복한다. 주목하라는 얘기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에 몰입되면 그것에 짜맞춰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렇게 작동한다.

-= 인간이 개를 물면 : 야구. 평소 습관을 이용한 독살 트릭.

-= 대박의 꿈 : 경마. 

-= 육체보다 정신을 : 권투. 이번에도 공정한 추리 게임이다. 코트에 주목하라고 시작할 때부터 강조한다.

-= 트로이의 목마 : 미식축구. 보석 도난 사건. 뻔히 보이는 곳에 숨긴다는, 고전적 트릭이다.


202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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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북다 2024년


묻지마 범죄 속에 숨겨진 의도적 살인


가가 형사 시리즈다. 이전에 나온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 장편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가가 형사 개인의 이야기가 없다. 처음 읽는다면 이 주인공에 대한 매력도 딱히 못 느낄 것이다. 그냥 형사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교묘한 복선과 연이은 반전, 충격적인 결말, 재미." 그 어떤 추리소설에도 갖다붙일 수 있는 광고문구다. 복선 있지만 딱히 재미는 없었다. 반전 있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충격적인 결말인가? 실망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지난 작품에 비하면 잘해 봐야 평작이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고 차츰 재미있어지고 결말을 보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하고 책장을 덮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이야기가 정말 끝내주거나 끝에서 눈물 펑펑 나서 손수건 없으면 감당이 안 될 지경이 된다. 잘 쓴 소설에서만 그렇다. 모든 작품을 다 잘 쓸 수야 없다.

소설은 '묻지마 범죄'를 다룬다. 자세히 수사에 들어가면 사건의 진상으로 또 다른 것이 숨어 있다. 작가는 여기에 방점을 두었다. 제목에도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독자는 이를 기대하고 읽기 마련이다. 기대를 낮게 해라. 예전 작품의 수준을 기대하지 말 것.

그래도 책 첫장에 산장 별장 컬러 지도가 보이니, 어찌 기대를 안 할 수 있으랴. 띠지에는 온통 격찬뿐이다. 최고 걸작? 어디서 거짓말을. "그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431쪽. '악의'를 능가하는 소설을 기대했다, 순진하게도.

이번 가가 형사의 추리는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세밀한 것이었다. 묻지마 범죄 속에 숨겨진 의도된 살인을 찾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뭔가 대단한 트릭으로 숨겨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겹친 것이었다.

202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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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
十戒 (2023)
유키 하루오
블루홀식스 2024년
4점 ★★★★ 괜찮네요


"추리소설에 이런 내용이 많잖아요. 탈출 불가능한 외딴 섬에서 살인이 발생하고, 거기 있는 사람들끼리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스토리요." 105쪽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후, 고립된 섬에서 갇힌 사람들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다. 유키 하루오의 소설 '십계'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휴대폰과 인터넷 시대에 맞게 보강한다.

맨날 폭풍이 하필 그 외딴 섬에 때맞춰 와서 사람들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식은 이제 그만하자. 폭풍 안 오고 스마트폰은 통화 가능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 섬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왜? 범인이 준 십계에 묶이기 때문이다. 하지 마라. 열 개. 십계를 어기면 섬을 폭파해 버린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역시 소설의 재미는 서사, 즉 사건의 전개다. 기대보다는 재미가 크지 않았다. 지루했다.

긴장감이 높지 않다. 사흘만 버티면 풀려 날 수 있어서 그런가. 그래도 어떻게든 범인을 추리해서 찾으려고는 한다. 십계에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네. 한 사람씩 죽어가는데도, 그 곳쿠리상을 해서 범인의 의사를 확인할 때마다 피식 웃기더라. 바로 옆 사람이 살인범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범인이 사람들한테 압도적 권력을 행사하는 신처럼 묘사하는데, 필력이 약해서 설득력이 없더라.

마침내 범인을 밝히겠다는 아야카와. 과연 범인은 누구며 어떻게 한 것이며 범행동기는 뭘까? 신발로 소거법을 이용해서 범인을 지목하는데, 웃음이 나오더라. 진지해야 하는데 살인범 잡는 중인데...

다 끝났나 싶을 때, 그러니까 이제 소설 끝나네 싶어 안도할 때 반전이 나온다. 1인칭으로 서술할 때부터 의심하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역시 반칙을 해야 반전이 큰 법이다.

이전 작 '방주'를 읽었다면 반전이 하나 더 있다. 마지막 사연(행방불명된 남편)에서 또 한 번 경악하게 된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너무 높게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다. 나름 잘 쓴 미스터리지만, 평타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깨달음은 얻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나 세팅이더라도, 좋은 이야기로 써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좋은 문장으로 쓰는 것도 또 다른 일이다.

202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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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line at Dawn (1944)

새벽의 데드라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7년 7월 발행
3점 ★★★ 무난해


:: 고향 가는 버스 타기 전까지 살인범 잡기 ::

'새벽의 데드라인'은 '환상의 여인'보다는 긴박감은 떨어지나 시간 압박은 있다. 고향 버스 시각 오전 6시가 데드라인이다. 목차는 아날로그 시계 시각으로 나온다.

고향이 같은 두 남녀. 도시 생활에 실증이 나서 떠나기로 한다. 단, 그 전에 남자는 부잣집에서 훔친 돈을 돌려 놓고 새출발을 하려고 한다. 여자도 같이 간다.

그 집에 갔더니, 시체가 보인다. 누가 왜 죽였나? 둘은 아마추어 탐정이 되어 용의자를 두 명으로 좁히고 각자 한 사람씩 좇는다.

억지다 싶고 무리다 싶고 말도 안 된다 싶지만, 필력으로 밀어붙이니까 넘어간다. 운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추리와 추적의 논리는 명확하고 정확하게 이어진다.

초중반까지 딱히 사건이 없어서 지루할 것이다. 작가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 그렇겠지만,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이들한테는 인내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용의자 좇을 때부터는 아름답게 멋부린 문장 따위는 없어서 빠르게 읽힌다.

추적 결과 범인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고 다시 원점 집으로 되돌아와서 추리를 다시 시작한다. 다시 또 용의자 추리고 다시 또 추적한다. 범인 잡아서 집에 묶어두고 경찰에 신고한 후, 드디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 해피엔딩.

대단한 탐정이 뛰어난 추리력을 발휘하는 식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추리해서 용의자를 추적하는 식이라서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그런데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흥미와 재미는 다르다. 흥미롭더라도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추리소설에서는 소설 거의 끝까지 독자 혹은 범인 찾는 탐정/경찰/주인공이 헛수고를 하게 만든다. 작가 입장에서는 그게 잘 쓴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독자가 되어서 읽어 봐라, 그게 재미있는지 짜증나는지.

읽으라고 추천 안 한다. 그래도 혹시라도 읽는다면 기대 수준을 '환상의 여인'보다 낮춰야 한다.

- 밑줄 긋기
누구든 결국에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만의 필터로 걸러서 보기 마련이다. 46쪽.

202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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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여인
The Lady in the Lake (194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 
2004년 10월 발행
3점 ★★★ 무난해


:: 집 나간 부인 찾아 삼만리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집 나간 부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가장 마지막으로 부인을 본 산장으로 갔더니, 근처 호수에서 여자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킹슬리의 부인 크리스탈이 아니라 산장지기의 집 나간 부인 뮤리엘이었다.

크리스탈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던 남자는 누군가한테 살해당한다. 경찰은 크리스탈을 의심한다.

우리의 주인공 필립 말로는 이번에도 역시나 또 헤매고 또 얻어맞고 다닌다. 의사, 간호사, 경찰 등이 마약과 뇌물로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간호사는 뮤리엘인데...

크리스탈한테서 연락이 왔고 도주할 테니 돈을 달라고 해서, 돈을 말로가 전달하기로 한다. 드디어 말로는 크리스탈을 만난다. 티격태격 와중에 누군가한테 얻어맞고 기절한다. 깨어나니, 크리스탈은 사망한 상태. 이로써 시체만 셋. 도대체 누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의뢰인이 범인인가? 킹슬리는 그 산장에 있었다.

자, 모두 산장에 집합.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 

옛날 작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또 연기의 신이다. 허기야 나도 서양 여자, 특히 백인 여자는 약간만 비슷해도 구분이 잘 안 가더라.

끝은 그냥 그랬다. 끝이 좋아야 하는데... 비추다.

202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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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적
아카가와 지로 지음
한성례 옮김
씨엘북스 펴냄
2012년 3월 발행
4점 ★★★★ 괜찮네요



:: 전 강좌를 수강 신청?

시리즈 1탄 추리에서 거의 만신창이가 된 형사 아저씨는 과연 잘 지내고 있는가? 잘 지낸다. 표를 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사건 수사하는 일상은 계속된다. 여동생도 홈즈도 잘 지낸다. 이 고양이는 여전히 수사 방향 힌트를 준다.

'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 끝은 시리즈로 이어갈 그 어떤 징후도 없었다. 작가 스스로도 딱 이 한 편만 쓰고 끝낼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인공 형사와 그 동생을 그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겠지. 갑작스러운 인기를 얻자 다음 편, 또 다음 편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기나긴 시리즈가 되었다.

이번 2탄은 과거 풀지 못했던 사건을 다시 해결하고자 나선다. 시작부터 수수께끼다.

형사의 여동생이 근무하는 교양 강좌 학원에 한 여자가 와서 수상한 짓을 한다. 학원의 모든 강의를 모두 수강 신청해 버린 것이다. 형사인 오빠한테 그 여자를 미행해 보라고 했는데, 허탕을 친다. 신청서에 적힌 연락처에 전화를 해 보니, 주인공 형사 소속 수사1과다.

수강자 이름을 조회해 보니, 2년 전 살해당한 여자다. 과장은 이 미제사건 조사를 가타야마 요시타로한테 맡긴다.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살해당한 여자의 여동생, 학원 강사 두 명. 다잉 메시지 같은 LYS는 뭘까?

소설은 거의 끝나가는데, 살인미수에 독살까지 일어난다. 독자인 나도 주인공인 형사 가타야마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사 또 한 명이 살해당한다. 전혀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복수극이었다. 1탄보다는 조금 가볍긴 하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무겁다.

수수께끼들은 우연이 만든 오해였다. 뭔가 결정적 힌트라고 여긴 내가 바보된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 못했다.

반전에 반전이 있어서 끝까지 읽어야 했다. 모든 수수께끼는 풀린다.

쓸쓸한 결말이지만, 끝은 웃긴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202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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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걷다
It Walks by Night (1930년)

존 딕슨 카
로크미디어 | 2009년

:: 첫 작품도 역시나 밀실이다

'밤에 걷다'는 존 딕슨 카의 첫 장편 추리소설이다. 책 제목이 수필집 같다. 하지만 추리소설이다. 코넬 울리치의 소설 같은 제목이긴 하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시신 발견. 게다가 밀실. 애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를 이어받았다. 정통 추리소설. 여기에 카 본인의 색, 오컬트를 살짝 입힌다. 흡혈귀, 늑대인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면서 온갖 복선을 뿌려대는 솜씨는, 첫 작품에서도 발휘했다.

"흙손을 떨어뜨린 살인마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카지노에 두고 간 사람, 옆방에서 살인자가 피의 향연을 벌이는 와중에 평온하게 책을 읽는 사람이라니!" 61쪽

이 모든 복선은 회수되어 명쾌하게 해명된다.

성형 수술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의심은 했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건의 진상은 사랑의 작대기가 왔다갔다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랑에 미치면, 그래 그럴 수 있지.

202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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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털 고양이 홈즈의 추리
아카가와 지로 | 씨엘북스 | 2012년
5점 ★★★★★ 끝내줍니다

:: 힌트 주는 고양이

책 표지 보니 읽기에 가벼운 소설로 보였다. 시작부터 살인 사건. 이후 캐릭터와 수사 진행은 만화 같았다. 문체는 간단했다. 빵빵 웃기는 식은 아니고 소소하게 웃기면서 수사가 진행된다.

제목 보면 고양이 홈즈가 주인공인 듯한데, 수사는 말단형사 가타야마 요시타로가 한다. 고양이 주인이 밀실 살인으로 죽자, 고양이는 가타야마한테 맡겨지게 된다. 정확히는, 가타야마의 여동생 하루미가 맡아 키운다.

고양이가 영특해서 사건 해결이 도움이 될 것을 알려준다. 협박장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형사랑 같이 다니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

연쇄 살인인데, 딱히 복선이나 단서가 안 보여서 추리는 거의 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문투성이다. 식탁과 의자는 누가 왜 훔쳐갔는지 모르겠고, 밀실인데 살인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고, 건축 관련 비리가 연계된 듯 보이는데...

사건 수사보다는 형사 가타야마의 맞선을 방해하는 유키코의 모습이 더 재미있었다.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 연애가 더 재미있다.

계속 사람이 죽어가는 판국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혼자서 잠복근무를 하던 선배 형사는 범인을 봤다고 말하며 죽고 만다.

"정신이상자가 학생을 살해하고, 모리사키 교수가 살해되고, 학장이 비리를 저지르고, 이번에는 폭탄이 터지고..."(338쪽)

소설 후반부로 가도 도대체 범인을 모르겠더라. 이제 몇 쪽 남지도 않았는데... 이럴 때는 대개가 가장 의심이 안 되는 사람이 범인이다. 역시나 그랬다. 달달했다가 씁쓸하게 끝나네. 와, 이렇게 끝내다니. 가볍게 즐겁게 스트레스 푸는 소설이라더니.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또 한 방을 더 먹이네. 징헌 작가다. 또? 아주 끝장을 내는군. 형사/독자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너덜하게 만들다니. 지독한 작가다.

표지에 속지 마라. 고양이, 유머 미스터리, 어리버리한 형사. 속지 마라. 내가 읽어 본 추리소설 중에서 가장 우울하다. 독하고 쓰다.

202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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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은신처
Hag's Nook (1933년)

존 딕슨 카
엘릭시르 | 2022년


:: 사건보다 연애가 더 기억에 남네

'마녀의 은신처'는 마녀라는 단어가 제목에 있어 기대와 달리, '화형 법정'만큼의 오컬트 미스터리는 아니었다. 미신, 저주는 포장일 뿐이라서 사건 본질과는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이를 알기까지는 책 절반 정도 읽어야 한다. 본격 추리소설의 살인 미스터리가 핵심이고 이를 풀어내는 것이 소설의 본 모습이다.

초반부는 로맨스 소설 읽는 줄 알았다. 알콩달콩 달달한 연애 이야기 쓰는 데 재미를 붙인 나머지 이 소설이 미스터리 장르라는 것을 잊게 될 지경이었으나 다시 추리소설로 되돌아온다. 중간에 다시 또 연애 모드로 돌입하네. "이 광기 어린 토스트를 던져 당신을 맞히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아휴, 됐어요. 그만해요.

기디언 펠 박사가 처음 나오는 소설이다. 그와 그의 아내, 그가 사는 집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온다. 펠 부인은 왜 그렇게 웃긴지. 펠 박사가 사전편찬자? 어색하네. 

펠 박사는 셜록 홈즈, 푸아로, 브라운 신부, 매그레 반장처럼 개성이 확실하고 매력적인 탐정은 '내게는' 아니다. 난 누군지 알지. 안 알려주지롱. 약 올리는 거 외에는 딱히 뭐 없다. 

'화형 법정'과 '구부러진 경첩'과 '세 개의 관'에도 펠 박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 책 뒤에 작가 정보 작품 목록을 보고서야 알았다. 탐정보다는 사건과 트릭, 그리고 반전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카를 기억하고 카의 소설을 찾아 읽는다.

이번에도 계획이 어긋나게 일이 복잡하게 된 것이었다. 시계 트릭을 쓰네. '세 개의 관'에서도 쓰더니만. 신분 사기 또 나오네. '구부러진 경첩'에서도 나오더니.

마지막 장을 읽기 전까지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재미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연애 이야기 빼고는 지루했다. 주객전도. 사건은 별로고 연애가 인상적이었다.

범인의 자백서 읽으니까, 작가가 다소 무리를 했다 싶다. 아무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빡빡하게 굴지 말고 그냥 넘어갈 수 있긴 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가 책 판형을 바꾸고 글자체를 바꾸고 표지 다지인도 바꾸었다. 이런 전집, 혹은 시리즈를 사 모으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하다. 출판사에서야 사정이 있겠으나 구매자 입장에서는 난감하다. 

이 책 읽으면서 등장인물 목록이 뒤표지 책 날개에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그게 그렇게 편리했구나! 이제 알았다. 그 점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202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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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핌의 선택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3점 ★★★ 무난해

오늘날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쉽고 편하게 읽히게 번역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소설(외국소설이라면 더욱)의 시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것이 상식이고 예의다. 7장 끝에서 '재테크'가 나와서, 고속버스 타고 잘 가다가 급정거한 기분이었다. 사극 드라마에서 전자 손목시계 나온 것보다야 덜하지만. 

추리소설에서 특정 지역, 나라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특정 외모를 지난 사람은 이런 성격 저런 기질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늘어 놓다니. 심리학자가 자기 전공을 버리고 관상 책을 써야겠다고 하면서 끝나다니. 관상이라니. 이 찬란한 필력으로 그렇게 쓰다니. 눈썹. 아이고야.

사건 수수께끼가 지나치게 늦게 나오고 결정적 증거 혹은 단서가 단순하다. 반전이 있다. 바로 이 반전이 조세핀 테이의 강조점이다. 미스터리의 재미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성찰로 마무리한다. 그렇다,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대학 졸업 반의 갈등 구조 속에 과연 이걸 고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루시 핌의 고민. 사건 해결보다는 이런 상황이 더 흥미로웠다. 그 물건 하나로는 기소가 될 것 같지 않던데...

202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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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The Crooked Hinge (1938년)

존 딕슨 카
고려원북스 | 2009년

:: 세 배로 골치 아파진, 재미난 상황

시작이 살짝 지루했는데, 조금 지나니 어느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개된다. 추리 범죄 미스터리의 단골 소재인, 재산을 노린 신분 사기. 서로 자기가 진짜라며 싸우는 난리를 재미있게 지켜보는데, 어렸을 때 무심코 찍어 놓은 지문이 있었단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싸운 거야? 별 의미도 없잖아. 화풀이? 어쨌거나 서로 지문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한 사람이 죽는다. 

가짜라고 판명될 것 같아 자살한 듯 보인다. 하지만 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니. 여기까지가 1부. 2부 시작은 '자살이냐 살인이냐'다. 신원 확인 문제는 해결이 안 된 상태다. 그 지문 찍어 놓은 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흉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배로 골치가 아파진, 재미난 상황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동인형 등장, 두둥. 세 배로 골치가 아파진, 더욱 재미난 상황. 이 작가 자신감 미쳤다.

밀실은 아니지만, 도대체 "한 남자가 모래밭 한가운데 혼자 있으면서 어떻게 살해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핵심이다. 주요 트릭도 여기에 있다. 힌트를 주자면, 누군가 뭔가를 강하게 쓸데없이 강조해서 부정하면, 의심해 보라.

'화형 법정'처럼 반전에 반전이 있었다. 마지막 장이 없었어도 괜찮은 미스터리였다. 기드온 펠 박사의 추리는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무리하듯 보인다. 애써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데... 어쨌거나 계획하고 배치한 복선이 있었으니 되도록이면 다 회수하는 것이 맞긴 하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속이 시원하긴 하지.

권선징악 정의 차원에서는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이 결말로 인해, 소설의 주인공은 범인이 된다.

202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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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 법정
The Burning Court (1937년)

존 딕슨 카
엘릭시르 | 2013년

:: 오컬트 추리소설의 아름다운 개화

추리소설 편집자 에드워드 스티븐스는 논란이 많은 작가의 원고를 읽는 중에 사진 하나를 발견한다. 내 아내가 왜 거기서 나와? 똑같이 생겼다. 마리 도브리. 칠십 년 전 살인죄로 목이 잘린 후 화형까지 당한 여인이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차고 있는 팔찌마저 같다. 비소로 많은 사람을 죽인 독살범. 비소 중독은 그 증상이 위염과 유사하다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는 사이에, 그 사진이 사라진다. 아내가 의심스럽다. 사진 가져 갔냐고 물으니 완강히 부정한다. 그럼 가정부가 가져 갔나? 뭐지?

최근 고인이 된 마일스 데스파드가 비소 중독으로 죽은 것 같아서 조카 마크 데스파드의 부탁으로 함께 조사에 들어간다. 무덤 파러 간다. 아내의 예언(아마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예요)대로 관은 텅 비어 있었다. 밀실! 납골당에는 유령이 아닌 이상에야 들어가고 나올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관에서 시체를 빼서 나갔는가?

혹시 아내는 늙지 않는 마녀? 그 독살범? 존 딕슨 카답게 초반부터 신비롭고 으시시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녀, 유령, 밀실. 특히, '화형 법정'은 이 신비주의 분위기를 소설 후반부까지 밀고 나아간다. 심지어 죽었던 마일스를 목격한 사람이 나온다. 죽지 않는 인간?

당연히 아니다.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명확히 밝혀진다. 과학적 해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 책 '화형 법정'은 추리소설이다. 공포소설이 아니다. 그렇게 여겼는데... 와 끝에서 이런 맙소사다. 이번에도 본래 계획이 틀어져서 복잡하게 된 유형이었다.

카가 마무리를 로맨스로 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그의 추리소설들은 죄다 어김없이 두 남녀의 사랑 확인으로 끝났었다. 하지만 이 '화형 법정'은 오컬트로 끝난다. 마지막 '에필로그'로 오컬트 추리소설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와, 정말... 반전에 반전이 멋지다.

최고다. 추천한다.

202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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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의 양초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2016년 9월 발행
2점 ★★ 에효


:: 오빠한테 양초 살 돈 1실링만 남긴 유서

추리소설은 제목이 대개 주요 단서, 힌트,  혹은 맥거핀(중요한 척하는데 시선 돌리기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크리스틴의 양초. 크리스틴은 희생자 이름이고 그 사람의 양초라면 단서일 텐데, 초반 아무리 읽어도 양초는 안 보이고 옷에서 떨어진 싸구려 단추가 엄청 중요하다. 그 단추가 범인의 옷에서 떨어졌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초중반에 와서야 양초가 등장한다. 유서에 나온다. 

'오빠 허버트에게 양초 살 돈으로 1실링' A Shilling for Candle 원서 제목은 유서 내용 그대로다. 초 살 돈 1실링. 크리스틴의 양초가 아니라 허버트의 양초다.

주 용의자는 유서에서야 갑자기 등장한 오빠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 최근까지 같이 지내던 사기꾼 같은 남자 로버트 티스덜이다. 최근 작성한 유서에는 그한테 많은 재산을 주는 것으로 나와 있다. 범인인가? 하는 행동을 봐서는 너무 바보 같아서 아닌 것 같은데... 연기라면 대단한 배우겠고. 티스덜은 도망을 치고 그런 중에 자기가 죽였다는 미치광이 여자 등장에 그랜트 경감은 짜증이 나서 미칠 지경이다.

내가 범인이라면? 내가 그라면 다음 행동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다시 스스로 대답해 보는, 두 경찰의 모습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수사과 경찰이라면 정말 이렇게 할 것 같다. 용의자는 놓치고 수사는 진전이 없다. 진짜 수사는, 코트 찾아 삼만리, 에리카라는 소녀가 맡게 된다. 갑자기 청소년 탐정 소설이 되네.

이야기는 용의자로 이 사람 저 사람 짚어 보다가 다시 허버트와 양초에게로 되돌아간다, 드디어. 이제 후반부다. 그리고 그 망할 단추 떨어진 코트도 찾아낸다. 여기까지 읽었어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드러난 정체는 정말이지 너무하네. 계속 헛짓했던 거네. 참, 유서는 뭐야? 여전히 의미를 모르겠는데... 맥거핀이었나?

이 작가는 추리소설이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대놓고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다. 사람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경찰이 감으로 수사하고, 결정적인 사람이 이야기 끝에서 자백 혹은 증언을 한다. 초중후반까지 범인이나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으면 그게 미스터리라고 여긴 모양이다. 끝까지 읽어 준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는 십원 한 푼어치도 없는 작가다.

조세핀 테이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문장 때문에 읽는다. 아, 정말 글 잘 쓴다. 이야기는 잘해 봐야 2루타지만 문장은 언제나 홈런이다. 문장 속에 살고 싶을 지경이다. 아, 그놈의 관상쟁이는 그만했으면 싶은데, 정말 꾸준히도 나온다. 미스터리 빵점. 문체 백점.

사랑에 빠져도 결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마저 끌어안는다. 
그래 그게 사랑이다. 

뭐야? 어느새 조세핀 테이 문체 흉내내고 있네.
사랑했다, 조세핀 테이의 문장을.
잊으리라, 조세핀 테이의 미스터리를.

20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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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비채 펴냄
초판 2011년 11월 발행
특별판 2017년 7월 발행



소설은 판단을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직접 이야기하기보다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하루키식인 모양이다. 자기 소개 대신에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을 이야기해서 간접적으로 자신을 말한다.

따뜻한 온기를 주는 소설을 쓰고 싶단다. 무척 와닿았다.

바흐의 인벤션을 언급하는데, 왼손과 오른손을 공평하게 쓰는 점이 마음에 든단다. 아무래도 필기는 한 손만을 주로 쓰기 때문에 장편소설을 쓸 때는 어깨가 아프다고.

인벤션 쳐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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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관
The Three Coffins (1935년)

존 딕슨 카
엘릭시르 | 2017년

:: 밀실 강의까지 했는데 재미는 그다지

책은 결국 직접 읽어 봐야 알 수 있다. 남들 말에 현혹될 수 있지만, 그걸 믿으면 안 된다. 카의 정수, 카의 최고작, 밀실 추리소설의 걸작. 카의 팬들이 하는 말이다. 그토록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이 이렇게 깨끗할 수야 없지.

기대를 많이 했다고 이에 실망이 컸다. 특히, 밀실 강의를 기대 많이 했는데 말 그대로 강의일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추리소설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트릭들.

초반 괴기 마술 유령 분위기는 좋았는데,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밀실 살인이 그 뒤를 이어받는다. 여기에 마술 트릭이 더해진다. 끝은 나름 로맨스다. 아니 언제나 로맨스였나. 유다의 창, 황제의 코담뱃갑. 둘 다 끝이 로맨스였네.

잘 짜여진 밀실 미스터리다. 계획이 어긋나면서 일이 꼬이고 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다의 창'과 비슷했다. 카 스타일인 모양이다.

아무리 잘 만든 미스터리라 하더라도 재미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트릭은 자세하고 긴 설명을 요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피곤할 수 있다.

202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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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코담뱃갑
The Emperor's Snuff Box (1942년)

존 딕슨 카
엘릭시르 | 2014년

:: 범인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는 미스터리

광고에 속지들 마라.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도 혀를 내둘렀다는 심리 트릭으로 유명하다." 유명 소설가 이름 팔아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의심부터 해야지, 그걸 믿냐.

제목 '황제의 코담뱃갑'이 결정적 힌트다. 범인이 누군지 당신은 알 수 있다. 왜 어떻게는 몰라도 누군지는 단숨에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먼 거리에서 그게 그거라는 안다는 게... 쉬. 더는 말하면 안 되겠지. 간단한 추리퀴즈 단편이었으면 괜찮을 텐데, 장편으로 늘리며 질질 끌다보니 사건 얘기를 계속 반복한다. "살인범의 정체를 알려주셨습니다." 아, 범인이 얘라니까, 얘라고. 거참, 이 사람이라고! 

막장 드라마 전개 속에서 독자가 못 맞추게 하려고 아주 생 쇼를 해서 짜증이 났지만, 마지막 해피엔딩 로맨스로 모든 것은 용서되었다. 지지폼폼. 네 죄를 사하노라.

'유다의 창'을 읽고 기대치를 너무 높였다. 알고나면 시시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불가능한 범죄를 선보인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존 딕슨 카 추리소설이 맞다. 범인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무슨 텔레파시 살인도 아니고 이건 불가능해. 저 건너편에 보이는 사람은 뭐냐고. 살인자가 티임머신을 타지 않은 이상에야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막장 드라마 이야기 싫은 사람은 딱히 안 읽어도 손해는 아니다. 시간 낭비 안 하고 다른 좋은 작품 읽기 바란다. 존 딕슨 카 작품 찾아서 읽을 정도면, 이미 유명한 추리소설 수작들은 섭렵했을 거라 짐작되지만. 그러니까 셜록 홈즈 전집과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은 다 읽었겠지.

기대치를 낮추고 가볍게 읽기에는 괜찮은 소설이다. 

다음 읽을 소설이 '세 개의 관'인데, 살짝 걱정이 되네. 기대치 최상이라서.

20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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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살인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2018년 5월 발행


그랜트 경감이 처음 등장하는 소설이다. 미남이고 경찰처럼 안 생겼고 기본적으로 증거와 사실을 중시하지만 자신의 감도 믿는다.

극장 대기 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분명 살해된 자의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의심스러운데... 어쨌거나 범인은 살해된 자의 앞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살인을 했는지 좀처럼 알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살해당한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살해한 사람을 체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희생자의 신원이 밝혀지기 전에 살인자가 잡힐 지경에 놓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당한 상황. 여전히 왜 그가 살인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살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든 증거는 그를 살인자로 봐야만 하는데, 감은 그가 아니라고 한다. 

실망했다. 아, 너무했다. 그랜트가 계속 헛다리 짚고 계속 잘못 추리한다. 범인이 자수해서 자백해서야 사건이 해결된다. 이것은 추리소설 장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독자가 범인이나 범행을 예측할 수 없도록 거의 후반까지 허탕치게 할 수는 있어도, 사건 해결이 탐정/경찰 주인공이 아닌 범인 자신의 자수로 되는 식은 정말이지 아니다. 자수하는 동기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세상에는 분명 착한 사람이 있다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빼어난 문장력으로 목가적 풍경화를 그려내고 생동감이 넘치게 인물들을 묘사하며 성실하게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발군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루하고 심심하고 착해서야. 

"참 희한한 일인데 그 사건에는 악한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아." 그렇다. 조세핀 테이는 첫 작품부터 코지 미스터리를 지향했다. 번역 제목은 줄 살인사건이지만 원서는 Man in the Queue, 줄에 선 남자다. 착하다 착해.

20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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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시공사 펴냄
2012년 12월 발행


'프랫 패러의 비밀'은 조세핀 테이 소설 중에서 드물게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중후반부터는 끝이 궁금해서 읽기를 멈추기 힘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추리소설답다. 범죄 미스터리 장르에 부합하게 잘 만든 소설이다.

소재는 흔하고도 유명한, 부잣집 유산을 가로채기 위한 신분 사기다. 그런데 중반에서 살인 미스터리로 바뀌더니, 후반에는 대결 구도로 전환시키고, 결국에는 모든 의문을 해결한다. 그리고 어느새 해피엔딩에 이른다.

혼잣말을 통한, 세세한 심리 묘사. 마치 오늘 만난 이웃을 보는 듯한, 생생한 인물 묘사. 어제 내가 했던 친구랑 수다를 연상시킬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 여기에 과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살포시 전개하는 로맨스까지. 다른 작품에서처럼 폭소를 자아내는 유머는 아쉽게도 이 소설에는 없었지만, 자잘한 농담과 깨알 우스개는 여전히 선보였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이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때 초반까지만 읽고 말았었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완독했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초반을 넘기자 중반부터 환상적인 미스터리가 전개되었고 아름다운 끝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추천한다.

202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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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리드비비 펴냄
2024년 3월 발행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막힘 없이 끝까지 읽게 된다. 

다시는 읽지 않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다. 

빨리 읽고 빨리 잊는다. 

이것이 전형적인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베스트 소설은 아니고.


문장에 놀랐다. 간결하다. 쓸데없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다르게 말하면, 읽는 맛이 없다. 문체라고 할 것이 없다.


법정물이 겉모습이고 속사정은 정교하게 잘 짜여진 미스터리다.

반전에 반전을 마련해 두고 있어서 끝까지 흥미와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름 감동을 주려했던 것 같은데, 속죄의 길을 택하는 마지막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마무리를 위해 억지춤을 추는 모양새다.

202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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