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의 랑데부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 종이책 2015년 9월 발행 전자책 2017년 7월 발행
"사랑하지 않을 때 여자는 신사가 아닌 남자를 싫어해요.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신사를 싫어하죠." 249쪽.
이런 문장으로 밝고 가볍게 썼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코넬 울리치는 어둡고 불안하고 암담한 절망을 추구했다. 언제나 밤이다. 화창한 낮은 잠깐 스치고 지나간다. 희망은 없다.
첫 도입부는 영화 '시암 선셋'과 닮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하늘에 갑자기 떨어진 물체에 죽음을 당한다. 남자는 절망에 빠진다. 영화는 다시 사랑 찾아 행복을 회복하지만, 소설 '상복의 랑데부'는 복수로 나아간다.
황당했다. 비행기에서 무심코 버린 술병에 맞아 죽는다? 하필 딱 그 자리에 떨어져서. 시암 선셋처럼 냉장고가 아니라 웃진 않았지만. 그건 그렇다 치자.
항공기 회사를 이잡듯 뒤져서 그 병을 떨어뜨렸을 녀석들을 찾아낸다? 그 다섯 명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다? 그냥 사랑에 미쳐서 하는 짓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래 이 남자 미쳤다. 사랑에 미친 남자다. 그래서 슬프다. "사랑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환상을 향한 갈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395쪽.
누아르 로맨스의 완성이 뭔지 보여준다. 이 정도면 로맨스 끝판왕이다. 남들이 시시하다고 유치하다고 해도 나만 좋으면 된다. 원래 사랑은, 로맨스는, 환상은 나만의 것이다.
후반부 반전은 '80일간의 세계 일주' 트릭이다. 정확히 완벽하게 복수한다.
""그럼 징병 위원회까지만 같이 갈게." 그녀는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특이한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남자들이 징과 병을 들고 일렬로 서 있는 장면이었다." 122쪽.
읽다가 뭔가 싶었다. 설마 울리치가 저렇게 썼을까. 직역해서 옮기기 어려우니 의역했다. 이 정도면 창작 아닌가. 원서에는 징병 위원회가 draft board로 나온다. draft는 연필로 그리는 거로 board는 송판(pine board)으로 상상한다. 옮긴이 이은선의 재치다.
인터넷 검색과 최신 과학 수사 기술로는 풀어낼 수 없는 범죄 미스터리를 탐문과 관찰이라는 구식 수사 기법으로 풀어내는 주인공,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구식인데도 좋은 건 그게 구식이라서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며 변치 않은 인간미가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기록은 간단히 삭제할 수 있죠. 하지만 이 기록에는 인간이라는 차원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인간은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지." 557p
"나오미는 자신의 손을 다이아몬드의 손에 올려놓았다. 나오미는 얼굴을 들지도 않고 다른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본 여인이 지켜야 할 예법에 어긋나지도 않은 채, 감상적인 면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영국인의 목을 콱 막히게 했으니까." 564p
피터 러브시가 사골국물 같은 감동을 만들어낸 솜씨는 인정해 줘야 한다. 유치한 유머와 낡고 평범한 수사 추리법조차 이 감동 앞에서는 용서되는 것이다. 나름 웃긴다고 노력하는 건 알겠는데 아주 웃기진 않았다. 그냥 피식 웃거나 썰렁했다.
끈기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 시리즈의 특징이다. 자폐아의 실종을 끈질지게 추적해내는 주인공의 인간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적극 추천할 만한 소설은 아니지만, 읽고나서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는 아니다. 그럭저럭 괜찮다. 소심하게 살며시 추천해 본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는 더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 많이 안 팔린 모양이다. 무려 총 21권에 달하고 2022년 출간이 최근이다. 작가가 아직 살아 계시니, 더 쓸 수도 있겠다 싶다.
커트 보네거트의 마지막 장편소설? 마지막 회고록 같다.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다. 이 작가를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이 책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우선 그의 다른 책들을 읽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이 순서다.
보네거트의 쓰는 방식이 워낙 독특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극과 극이다. 그의 블랙 유머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내에 그를 좋아하는 독자가 의외로 많다. 이 사람 책이 보이면 무조건 집어서 읽거나 팬 페이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그의 인기는 스티븐 킹에 맞먹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패밀리 맨’에서 니콜라스 게이지가 커트 보네거트의 책(제목이 뭐였더라. 고양이 요람?)을 읽는 모습이 보인다. 참고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해리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다고 할 줄거리가 없다. 작가의 단편적인 생각, 기억, 사상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줄거리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다.
그가 예전부터 자주 주장하는 대가족론이 나온다. 그의 그런 생각은 낭만주의일 뿐이다.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도 없다. 그래도 하자면, 그가 한국에 살았다면 과연 그 대가족론을 계속 주장할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인류학 석사 논문이 거절당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랬던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석사 학위를, 인디애나 대학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塞翁之馬. 도대체 삶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Life goes on! 아카데미즘? 개뿔!
이 책은, 이 책을 쓸 당시 죽은 형에 대한 추억으로 마무리한다. "고상하고 품위 있었다." 자신이 젊었을 때 벌어진 어처구니없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이 적힌 편지가 이 책을 쓴 동기다. 책 맨 끝에 형과 찍은 사진이 있다. 1997년 발표작이다. 출간 후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언제나 그랬듯, 웃긴가요? 예. 웃깁니다. 딩동댕!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울거나 웃는 것뿐이라고. 울면서 웃는, 그의 파멸적 웃음은 씁쓸하면서도 유쾌하다.
그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갔다면 웃었을 것이고 그가 착한 심성으로 살았다는 이유로 천국에 갔다면 울었을 것이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 있다면, "다들 여기 있군그래.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너스레를 떨겠지.
이미 읽은, 혹은 본 듯한 이야기다. 열차 사고로 뒤바뀐 운명. 부잣집에 들어간 여인은 가짜 행세를 하는 중에 남편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산드라 블록 주연 [당신이 잠든 사이에]랑 비슷했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뭐지?
영화랑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에 시달리며 비극으로 끝난다. 이 원작의 초중반까지 써먹고 나머지를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식이었네.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영화 [사랑이라면 이들처럼(Mrs. Winterbourne)]은 마지막을 웃기고 행복하게 바꾸었다. 자기 정체성(본래 이름)을 회복한다. 잘먹고 잘살았다. 끝.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바라고 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말리고 싶다. 협박에 살인이 일어나지만,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것이다. 결혼하고서 행복해야 할 두 남녀에게 불안만 가득 안겨주는 시어머니의 편지로 끝난다. 누아르의 완성이다.
윌리엄 아이리시는 우리가 아는 전통적 의미의 추리소설, 그러니까 셜록 홈즈나 에르퀼 푸와로 같은 명탐정이 나와서 수수께끼 범죄를 수사해서 교묘한 트릭과 범인을 밝히는 식으로 끝나는 장르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대신에 암울하면서도 감정이 흐르는 분위기를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누아르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추리소설이 아니라 누아르 소설로 소개한다. 우리는 그냥 이것저것 다 뭉쳐서 추리소설이라고 부르지만.
가난과 절망에 쩌들어 있다가 갑자기 인생이 부와 행복과 사랑과 가족으로 충만하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양 사기를 치는 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남자의 협박을 받고 그 남자를 처리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죽였고 그 죽인 사람이 시어머니인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 정말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야기 자체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보다 문장과 그 문장이 전하는 분위기를 더 중요시하다 보니, 결말마저 그리 된 것이다. 불안으로 시작해서 불안으로 끝난다. 어둠이 지배하는 분위기다.
참, 중반쯤에는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다 보니 로맨스 소설 같은 분위기다. 자신의 정체가 들통이 날까 봐 조마조마한 상황도 같이 잘 그려져 있다.
누아르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범인 잡는 맛으로 읽는 추리소설을 바란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16년 6월 발행
딱 1장까지만 재미있었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하나의 이야기 노아의 방주를 시대순으로 변주해서 보여주는데 지루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고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쉽다. 이건 아니지 아니야.
소설에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줄리언 반스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설 형식은 흥미로웠는데, 정작 이야기 자체는 재미가 없었다, 나로서는.
그러고 보니, 어쩌면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첫 아리아만 듣기 좋아하고 나머지 변주곡들은 딱히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변주곡 모두를 흥미롭게 재미있게 들었지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요즘 다시 독서에 재미를 붙이면서 드는 생각이다. 책을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전부 다 이해할 할 필요는 없다. 그럴 책이 있고 아닌 책도 있다. 더구나 즐거움을 위해서 읽는다면, 애써 무리해서 읽어내지 말자.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Mother Night (1961)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09년 3월 발행
소설을 삼 분의 이 정도 읽을 상태에서 동명 영화를 봤다. 그리고 마저 소설을 다 읽었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설을, 소설을 읽은 사람은 영화를 보려고 할 것이다. 희안하고 재미있게도, 영화에서는 소설의 세부 사항을 생략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영화에서 소설에는 없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그냥 별다른 말 없이 체스 장기 말들을 조각하는데, 소설에서는 체스 말들을 조각하는 조각도가 한국 전쟁의 군수 물자로 받았다고 나온다. 소설은 주인공의 마지막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데, 영화는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끝난다. 참,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원작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가 실제로 나온다, 주인공 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커트 할아범의 대표작 '제5도살장'에 열광했거나 혹은 질린 독자한테, 이 장편소설 '마더 나이트'는 참으로 친절하다. 이야기가 대체로 시간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예 완전히 시간순으로 재배열해서 보여줬다. 눈물 날 정도로 고맙더라.
스파이, 정획히는 이중첩자 야이기다. 주인공 캠벨 2세는 이스라엘 전범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지난날을 나치 전용 타자기로 타이핑하면서 회상한다. 회고록 형식이다.
아, 미리 경고한다. 이중갑첩의 멋지고 긴장감이 넘치고 재미나는 활약상을 기대하지 마시라. 전통적인 영웅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좋아하는 독자라면, 보네거트의 소설은 피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능동적으로 뭘 하는 캐릭터가 아니고 수동적으로 당하는 인물들이 나오니까. 서양장기 체스의 말, 폰을 생각하면 딱이다.
주인공 켐벨은 부조리 캐릭터다. 반유대주의자로 나치 선전부에서 라디오 선전방송을 하는데, 실은 그 방송을 통해 미국 정보부에 유용한 정보를 전달한다. 본인 스스로야 미국의 영웅이라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치다. 그의 장인어른조차 네가 미국 스파이건 뭐건 어쨌거나 선전방송 자체를 훌륭하게 해냈으니 딱히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니.
"다른 사람이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 데도 못 가는 사람, 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을 아우슈비츠에서 수천 명이나 봤어." 325쪽
나는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날마다 보고 있다. 거울 보면 내가 보인다. 사는 데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317쪽)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서,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서, 또 누군가는 권력을 위해서 산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말해, 뭐 어쩌다 보니 그냥저냥 살고 있을 뿐이지 않나.이 소설 읽고서 인생의 목표를 고민할 줄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뭔가를 스스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래서들 예술가를 부러워 하는가 보다.
도대체 전쟁에 왜 그렇게들 환장할까? 작가의 통창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을 읽었다면 밑줄을 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악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추악함에 이끌리는 것이다. 남을 처형하고, 비방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백치 같은 그런 마음 때문이다." 320쪽
주인공/작가는, 전범에 대한 올바른 조치가 사형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이라고 한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일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죄라고 인식조차 못 하고 있으니. 그리고 용서해야 한다고. 왜 예수가 그토록 미움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Flaubert's Parrot (1984년) 줄리언 반스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논할 때 빠짐없이 나오는 소설이 바로 이 '플로베르의 앵무새'다. 워낙 유명해서 모르고 있으면 책하고는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소설 픽션은 아예 안 읽는 독서가일 것이다.
아직 안 읽어 봤더라도, 플로베르의 평전 형식을 띤 소설이다 정도는 어디선가 읽거나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막상 실제로 읽기 시작하면서 발생한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읽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다. 간신히 읽어냈다고, 플로베르 관련 배경 지식이나 그의 소설들을 읽은 후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독후감도 보인다.
어이가 없었다. 너무들 진지하게 문학하는 독서를 하려고들 하는 거 아닌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잡담 농담 평전 수필 소설이다.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된다. 아무 쪽에서나 읽기를 중단해도 딱히 아쉬울 건 없다.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는 반복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열 번 이상은 분명하다. 이야기의 전반인 분위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미라는 미케리누스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았다."(147쪽) 아씨, 어쩌라고 이 양반아.
딱히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고 궁금한 다음도 없는데, 아! 이런, 계속 야금야금 더 읽고 싶어지는 거였다. 왜 이러지? 희안하네. 어느새 다 읽어 버린 나 자신한테 배신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어, 이건 아니지.
천박한 음담패설이 있는가 하면 심오한 통찰이 써 있었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09쪽)
키득키득 웃다가 으잉 황당하다가, 이런 저질하다가 와 놀랍군 하다가, 이것저것 하다가 어느새 더 읽을 문장이 없은 거였다. 정말 맛있는 짬뽕이었다.
종이책 읽기는 너무 고역이긴 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해. 전자책으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책은 몇 번인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갔다. 뭘까? 새로 나온 추리소설인가. 일본 작가인 모양이군. 궁금해서 책장을 열어 보니, 보물섬을 쓴 바로 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소설이다. 모험소설이라면 모를까, 범죄소설은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안 읽고 있는데, 도서관 서가를 거닐 때마다 '자살 클럽'이라는 제목의 책이 계속 보였다. 호기심을 이겨낼 고양이, 아니 사람은 없는 법. 때마침 열린책들 세계문학판 번역으로 나왔고 도서관에 새 책으로 얌전하게 꽂혀 있어서 드디어 읽었다.
역시나 스티븐슨은 모험소설가였다. 소재가 범죄더라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모험극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험을 무릎쓰고 기괴한 사건을 직면한다.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식이 아니다. 기이하고 이상한 일들이 터지고 그런 사건에 휘말리다가 그냥저냥 대충 마무리된다. 뭐야 이게 끝이냐? 그러면 끝이다. 한참 재미가 나서 다음에 어떻게 될까 궁금증이 고조되면 바로 끝이다. 초점은 사건의 완벽한 종결이 아니라 사건 그 자체의 체험이다.
이 책은 총 4편을 골라 실은 단편소설집이다.
[자살 클럽]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 형식이다. 보헤미아 왕자의 모험담 외형으로 기괴한 범죄를 보여준다. 연재하는 식으로 세 편으로 쪼개져 있다.
- 크림 타르트 청년 이야기 : 삶의 권태와 파산에 몰린 사람들이 자살 클럽을 운영한다. 임의로 카드를 돌려 클럽 에이스를 가진 자가 스페이드 에이스 패를 쥐게 된 자를 죽인다.
- 의사와 사라토가 크렁크 이야기 : 시체를 여행가방 트렁크에 실어 운반한다. 당사자는 시체가 발견될까 봐 안절부절인데, 주변 사람들은 가방 안에 돈이 가득 들었다고 단정한다.
- 이륜마차의 모험 : 임시 도박/연회장을 마련해 용사를 모집하고 악당과는 일대일 검투로 정의를 실현한다. 자살 클럽 회장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린다.
[시체 도둑]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1829년 해부학 실습용 시체를 공급하기 위해 16여 명을 죽인 두 사람은 그 다음해 사형에 처해졌단다.
액자식 소설이다. 나는 젊은 시절 의학을 공부했던 페테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테스는 해부용 시체를 관리하면서 무서운 일을 경험한다. 전날 희롱했던 소녀가 시체로 들어오고 어제 동료와 다투던 남자가 오늘 해부용 시체로 들어온다.
전개는 모험소설이고 마무리는 공포소설이다.
[병 속의 악마]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가 있는데, 병 속에 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라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재를 차용해서 익살스럽게 현대식으로 바꿨다.
이 병을 사고 팔 때 규칙이 있는데, 산 가격보다 더 적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가격은 점점 작아져 현재 자기 나라의 통화로는 더 싸게 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화폐 단위가 더 작은 나라로 간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한 나머지 그 병을 사고 또 되팔고를 반복하다가 한계에 이르는데...
심각하게 파국 직전으로 가던 이야기가 웃음으로 유쾌하게 끝난다.
[말트루아 경의 대문]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 풍이다. 때는 1429년 세상은 전쟁 중이다. 드니는 밤중 길을 잃어 헤매던 중 적군한테 들켜 도망치던 중 대결을 하려고 칼을 뽑아 들고 등을 대문에 대자, 놀랍게도 문이 활짝 열렸다. 일단 몸을 숨기고자 들어가자 문이 스스로 닫혔다.
성에 갇힌 청년은 노인으로부터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하거나 죽으라고 강요한다.
갈등에 비해 결론은 흐지부지다. 남녀가 서로 얘기해서 그냥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다.
스티븐슨의 소설은 모험에의 매혹이다. 기승전결식으로 딱딱 사건이 들어맞고 확실하게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이하고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 독자는 그 모험을 글로 체험한다.
그의 소설에서 악당은 근사하다. 왜? 위선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도덕에 침을 뱉는다. "난 선천적으로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경멸해요. 지옥, 신, 악마, 정의, 부정, 죄악, 범죄, 이런 따위의 낡은 골동품들은 어린아이들이나 무서워 하죠. 선배나 나같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은 그것들을 경멸하죠." 156쪽
놀라움과 호기심 충족을 위한 모험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이 지점이다. "처음엔 놀라움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놀라움은 곧 은근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136~137쪽 아무리 읽어도 교훈은 없으며 좋은 문장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흥미로운 모험이 가득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 형식을 가져다가 자기 시대의 이야기로 바꾼 점이 흥미로웠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은 기이한 모험에 매혹되어 점점 빠져드는 인물에 공감되면서 이야기의 재미가 증폭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이었다. 애매모호한 언어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마침내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옮긴이가 적어놓은 친절한 주석을 따라 끝까지 다 읽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대표작이다. 김성곤의 표현을 빌면, 1960년대 미국 대학생들이 이 책을 경전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을 정도로 유명했다. '송어낚시'라는 단어를 은유로 쓰면서 물질문명에 찌든 미국사회를 풍자했다. 은유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했다. 한 단어가 의미할 수 있는 뜻을 무한대로 펼쳤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In Watermelon Sugar (1968년) 리처드 브라우티건 | 비채 2024년 5월 개정판 양장본 2007년 10월 초판
브라우티건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는 겉보기에 단순한 이야기이다.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미국 사회 비판이 흐른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196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국의 송어낚시]가 나온 다음 해다. 전작에 비해 신랄한 풍자가 적었다. 문체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역시나 같았다. 은유와 말장난으로, 기계 문명을 비웃으며 목가적인 꿈을 옹호한다.
도시 문명을 떠나 자연 생활을 추구하는 면에서 소로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무척 달랐다. 소로는 한껏 자연 예찬을 했다. 반면, 브라우티건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본다. 소로는 숲 속 오두막에서 숨을 쉬지만 브라우티건은 오염된 강에서 죽어가는 송어를 본다. 회복 불가능한 꿈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브라우티건은 소로의 이야기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미국은 이미 기계 문명에 의해서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의 정신마저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식을 취한다. 언어의 유희 속에서 침묵한다. 죽음 위에서 환상을 본다. 현실과 꿈의 중간 지대에서 방황한다.
소설은 '워터멜론 슈거'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곳은 현실이면서 꿈인 곳이다. 달콤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잔인한 이야기다. 꿈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추하다. 이야기는 그 모두를 담아 덤덤하게 강물처럼 흐른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같지만 꼭 그렇지 않으며, 자연과 문명이 대결하고 화합한다는 의미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로도 동화로도 시로도 읽힌다. 소설가는 꿈과 현실이 맞닿는 자리인 워터멜론 슈가로 들어가서 절망을 읊조린다.
이처럼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면서도 다양한 상상과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산문은 드물다. 시처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은유적 산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또한 모방해서 될 일도 아니다. 시인은 타고날 뿐이다. 시인은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 살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존재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감수성의 극한에 이른 자가 택할 길은 안타깝게도 자살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읽는 동안 멍 때리며 즐거운 기분이 드는, 희안하고 휘귀한 책이다. 미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게 읽힌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수록 재미있다. 기묘한 소설이다.
- 덧붙임 1 2007년 구판 편집 오류로 243쪽 작품 해설의 제목을 역자 후기로 해놓았다. 4쇄까지 찍고도 바로잡지 않았다. 6쇄에서도.
- 덧붙임 2 2007년 구판 그림은 소설의 은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그렸다. 그림이, 다양한 의미로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한다. 표지는 그렇다치고 본문 삽화는 책의 질을 청소년용 소설로 전락시킨다. 본문 그림은 빼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다.
- 덧붙임 3 2007년 구판 8쪽에 사진을 싣고 "이 사진은 미국 문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 아는 분?
- 덧붙임 4 2007년 구판 김성곤은 작품 해설에서 "브라우티건은 1968년에 벌써 iDeath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2000년대에 등장하게 될 iPod나 iMac을 예견했던 선구자적 작가였다."(251쪽)라고 썼다. 농담이죠?
- 덧붙임 5 2024년 5월 24일 개정판이 나왔다. 덧붙임 1과 2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드디어! 어, 잘 보니까 제목이 슈가에서 슈거로 바뀌었다.
작가 수업 Becoming a Writer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 펴냄 2018년 발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날마다 글을 쓰는 이는 드물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사람은 많다. 정작 영어를 우리말처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은 극 소수다. 피아노 연주를 잘하고 싶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날마다 두 시간 이상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런가? 작가가 되는 방법,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방법, 피아노 잘 치는 방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작가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무슨 일은 하는가. 문장을 쓴다. 문장들로 문단을 만들고 문단들로 글을 완성한다. 글 한 편 써달고 하면 도망간다. 한 문장은 누구나 쉽게 쓰지만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을 연결하여 하나의 그럴듯한 일관성과 충실한 내용을 담은 글을 완성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이미 누가 써놓은 것의 오탈자를 잡거나 편집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창작 행위다.
외국어는 어떤가. 땡큐 한 마디는 쉽다. 여러 상황에서 적절한 회화를 구사하려면 여러 표현을 알아둬야 하고 거침없이 나올 정도로 반복해서 암기해야 한다. 당신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는 힘들고 어렵고 재미도 없다고 이미 마음속에서 확신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도 그렇다. 도레미를 한 손 한 손가락으로 한 번씩 치기는 쉽다. 유치원생도 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치려면? 양손으로 동시에 여러 건반을 강약 조절해서 곡의 느낌에 어울리게 눌러야 한다. 당신은 그럴 수 없다. 할 수 없다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다면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마침내 해내는 사람은 무작정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확고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다.
작가가 되고 싶어서 이 책 '작가 수업'을 폈으리라. 작가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문장, 문단, 글을 완성하고 여러 출판사와 공모전에 내는 것이다. 대개들 안 하고 그만둔다.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포기하지 말라는 한 마디를 이토록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책을 써내는 글쓰기가 워낙에 외롭고도 지루하고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작가들이라 해도 글을 쓰는 동안은 혼자다. 옆에서 잘 썼다고 말해주거나 격려해주는 사람이 없다. 일단 글로 쓴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고 몇 마디 말을 들어 볼 수 있으니까.
특히, 글 막힘 현상은 작가에게 지옥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글이 더 안 써진다. 하루, 이틀. 괜찮다. 한 달, 일 년. 어떻게든 되겠지. 오 년, 십 년. 당신은 영감님만 부르게 되리라.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야 대답은 없다.
글이 더 안 써지는 상황에 직면했거나 영감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거나 몇 자 그적거리다 그마저 안 하고 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포기했던 분이라면 도러시아 브랜디의 이 책이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미국 작가들이 이 책을 작가 지망생에게 추천했다. 나는 이 책을 원서로 먼저 읽었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레이 브래드버리, 몰입하는 글쓰기(ZEN IN THE ART OF WRITING)'에서, 줄리아 캐머런은 '아티스트 웨이'에서 이 책을 언급했다. 번역서 끝에 붙은 수많은 서평을 보라.
'작가 수업'은 글쓰기가 아닌 작가가 갖춰야 할 습관을 다룬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책이며, 작가 지망생이든 이미 작가이든 필독할 책이다.
이 책은 작가의 습관을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글을 어떻게 쓰라는 '작법'이 아님을 명심하길 바란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은 'How to Write'가 아니라 'Becoming A Writer'다. '글 쓰는 법'이 아니라 '작가 되는 법'을 다룬다.
당신은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작가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을까? 영감을 날마다 꺼내 써도 영원히 줄지 않는 '복주머니'라도 있나?
작가는 글을 꾸준히 많이 잘 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비법을 도러시아 브랜디이 가르쳐 준다. 이른바 '작가들만의 비밀'이다.
에밀 쿠에가 '자기암시'에서 무의식(긍정적 상상)이 의식(의지, 노력)을 이긴다고 했듯, 이 책의 저자도 같은 말을 한다. 글을 쉽게 많이 쓰려면 무의식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 책 '작가 수업'은 이 무의식을 길들이는 여러 방법을 소개했다.
글이 소나기처럼 쏟아져서 순식간에 머리에서 목, 어깨, 팔, 손가락으로 좌르륵 흘러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려면 의식적 노력으로는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한 편 써 보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책상에 앉았는데, 공책을 폈으나 한 글자도 못 쓰고 엉뚱하게도 연필만 수십 개 뾰족하게 깎거나 철새가 삼각형 대형으로 날아가는 창밖 풍경에 마음이 가 있지 않던가. 그러지 말고 무의식을 이용하자.
무의식 훈련의 첫 번째는 평소보다 30분이나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자기 검열을 하지 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내용이나 쓰는 것이다.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중간 지대에서 자유 연상 글쓰기를 시행한다. 줄리아 캐머런의 '모닝 페이퍼'가 바로 이것이다.
이삼 일만 이를 실천해 봐도, 무척 놀라운 결과를 볼 수 있다. 자신이 써낸 글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정말 내가 썼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내 머릿속에 어떻게 이런 내용이 있을 수 있는지 당혹스럽다.
두 번째 훈련은 특정 시간대에 글을 쓰는 것이다. 당신이 날마다 오후 3시부터 3시 30분까지 글을 쓴다고 자신과 약속을 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시간대에 글을 써야 한다. 마침 그 시각에 택배가 와서 어쩔 수 없이 글을 쓸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해서는 아니 된다. 여러 번 시험해 봐서 좋은 시간대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이른 아침에 글을 쓰는 훈련과 아무 때고 글을 쓰는 훈련은 글을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88쪽) 저자는 이 두 가지를 성공하지 못하면 글쓰기 말고 다른 걸 하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이렇게 쓰기만 하면 작가가 되나? 아니다. 더 잘 쓰려면 반성하고 다듬고 고쳐야 한다. 여러 방법이 있겠으나, 역시 가장 유익한 것은 책 읽기다. 제9장 '작가로서 책 읽기'란 독자로서 한 번 읽는 게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읽는 것이다. 와, 이 문장 감동적이다. 밑줄 치자. 여기서 끝나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 소설가는 왜 이 부분에서 이렇게 썼을까? 더 좋게 읽히게 하려면 어떻게 써야할까? 이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라.
그 외의 작가 습관은 잘 알려진 대로다. 아이처럼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라. 솔직하게 써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하라. 작가라면 자기 노출을 감수해야 한다. 자기 표현을 즐겨라.
이 책의 핵심이자 바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답은 제17장 '작가의 비법'에 있다. 도대체 영감을 어떻게 쉽게 빨리 얻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다.
X : 마음 = 마음 : 몸
갑자기 공식? 188쪽에 나온 그대로 인용했다. X가 영감이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재능이라고 표현했다. '이야기 구상'이라는 더 정확한 표현도 썼다. "몸을 가만히 놔두듯 마음을 가만히 놔두는 법을 익히라."(189쪽)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때를 기억해 보라. 마음이 고요히 있을 때 문득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전기가 들어온 것 같지 않았던가. 참신한 아이디어나 해결책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난다.
이 정도까지 하면 누구나 작가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실로 '위대한' 작가로서 영원히 기억되며 꾸준히 읽히려면 방구석에서 글 잘 쓰려고 머리만 굴릴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잘 살아야 한다.
"얼마나 좋은 작품이 탄생하느냐는 그대와 그대의 삶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그대의 감수성이 얼마나 예민한지, 분별력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대의 경험이 독자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훌륭한 글쓰기의 요소를 얼마나 철저하게 익혔는지, 말의 가락을 가려짚는 귀가 얼마나 발달해 있는지에 달려 있다."(194~195쪽)
글에서는 정의를 말하고 생활에서는 온갖 비리와 배신으로 처세에만 능했다면, 과연 그를 '위대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작해서 글 하나는 잘 쓰는 작가 나부랭이라고 부르겠지.
진정한 작가가 되는 진정한 비결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글을 잘 쓰려면 삶을 잘 살자. 아니 삶을 잘 살려면 글을 잘 쓰자. 글이 삶이고 삶이 글이므로 사는 것과 쓰는 것은 같다. 다음은 내가 만든 공식이다.
삶 : 글 = 마음 : 몸
글을 써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옮긴 강미경의 말이다. "굳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자신이 해석하는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담아내 동료 인간들과 공유하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며, 그 능력을 깨우쳤을 때 우리의 삶은 한결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싶다."(208쪽)
글 쓰는 일이 삶을 사는 일이고 사는 것이 글쓰기가 될 때, 당신은 누가 뭐래도 작가다. 글을 써라. 삶을 살아라.
이제는 고전이 된 소설 '화씨 451'은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는 책이 없는, 책을 불사르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면서 오늘을 예언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생활. 텔레비전 방송과 광고에 중독된 사람들. 대화가 거의 없는 가족.
어떤 존재의 진정한 의미, 어떤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 존재가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공기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당장 진공 상태를 상상해 보라.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화씨 451'를 읽으면서 독서가 금지된 사회를 그려보라.
책이란 무엇인가. 파버 교수가 방화수 몬태그에게 하는 말이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 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136쪽)
책이 없는 사회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파버 교수는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정보의 질이다. 책은 세밀한 짜임새를 지니는데, 좋은 책일수록 진실한 삶의 이야기를 담는다.
둘째, 그 정보의 좋은 질을 충분히 되새길 수 있는 여기 시간이다. 여기서 여가란 일하지 않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뜻한다. 우리는 책을 읽다가 잠시 책장을 덮고 곰곰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책에서 읽고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다.
우리는 지금 책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진 않으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바쁘다. 뭔가 생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바삐 돌아간다. 나는 행복한가. 소설의 주인공 몬태그는 현실에 의문을 품으면서 책 읽기에 빠져든다. 천천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실행한다.
작가는 후기에, 등장인물 이름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 뒤늦게 알았다고 밝혔다. 몬태그는 제지, 파버는 필기구 회사의 이름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이십대 때였다. 도서정가제에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워낙들 요즘 말이 많아서, 문득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었다.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대중들 스스로가 책 읽는 것을 거의 포기했소."(143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는 요즘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세상에 누가 아이를 낳아 길러요?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157쪽) 책도 상품인지라 마케팅을 하면서 팔리긴 한다. 하지만 정말 읽고들 있는 걸까? 예쁜 인형처럼 사모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레이 브래드버리를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야기꾼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등장인물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강력하지도 특징이 있지도 않다. 작가가 설정한 상황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형에 가깝다. 단편적인 인물이다. 깊이가 전혀 없다. 사건 전개와 결말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 풍기다 끝나거나 냉소적인 문명 비판으로 일관한다. 그러니 재미없다. 다 읽고나면 덜 쓴 것 같다.
문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레이 브래드버리는 최고다. 운율이 있으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을 썼다. 번역문에서는 느낄 수 없으나 영어 원서로 읽으면 경이롭다. 시적인 산문이다. 멋지다.
나는 이 작가의 영어 원서를 읽고 절망에 빠졌었다. 문장을 이 사람보다 더 잘 쓸 수 없다. 나는 끝났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 야망이 컸고 뭔가에 빠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다시 읽어 보니 그렇게 대단하진 않다. 그래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레이 브래드버리는 내 문학의 첫사랑으로, 아름다운 문장의 여신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살아 있다.
단편소설 19편을 수록한 책이다. '화성연대기'처럼 각 단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이것저것 있다. '문신을 새긴 사나이' 이야기를 맨 앞과 맨 끝에 넣어 이야기 18편을 묶었다. 사나이는 온몸에 살아움직이는 듯 생생한 문신이 있다. 문신마다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과거 회상이면서도 미래를 예언하는 환상이다. 이 소설집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문신을 새긴 사나이'에서 미래에서 온 마녀가 새겼다는 문신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거"다. 작가가 추구하는 소설이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짧은 소설은 장르가 모호하다. 과학소설이라지만 그다지 과학소설 같지 않다. 판타지, 우화, 공포, 괴기, 범죄가 뒤섞였다. 미래사회를 그리는 설정에 시적이고 몽환적인 전설 같은 분위기다.
썰렁하고 별 재미가 없지 않나. 이런 항의나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소설이 짧아서라기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기승전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 제시, 상황 끝. 이런 식이다. 단편소설이 아니라 이미지나 우화로 읽힌다.
'기나긴 비'를 보면, 한없이 비가 내리는 금성에서 피난소 일광 돔을 찾아 헤매는 군인들이 나온다. 이상하고 으스스하고 황당한 상황이다. 몇 사람은 이내 미쳐버리고 자살하고 절망한다. 마침내 돔에 도착한다. "문이 닫히자 비는 다만 욱신거리는 몸에 박인 기억에 불과했다."(120쪽) 그리고 끝이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 혹은 썰렁한 농담. 갑작스레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니 사건이 발전하여 그럴 듯한 결말에 이르기를 바라지 마라.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야기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현대 문명을 매섭게 비난하며 화풀이를 한다.
집 안 놀이방에서 아프리카 초원을 생생하게 느끼거나(대초원에 놀러 오세요) 우주 미아가 되어 끝없이 추락하거나(만화경처럼) 금성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는다(기나긴 비).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에서는 문학 검열자들을 비난하고 '역지사지'에서는 흑인차별을 역공격한다. '도로가 전해준 소식'과 '세상의 마지막 밤'은 전쟁에 몰두한 인류의 종말을 보여준다.
기독교 종교 분위기의 소설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는 예수의 우주 미래 버전이고 '불덩어리 성상'은 외계인 기독교 선교다. 작가의 성찰은 상식적이면서 비판적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라서 대단한 것인가. 아니다. "그 남자는 우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가난한 자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위선과 부패에 맞서 싸웠고, 하루 종일 민중 속에 머물며 대화했다고 합니다."(85쪽) 종교인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인다.
"수집가는 행복한 인간들이다." 괴테의 말이다. 수집가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에 끌려서 신기하고 희귀한 것을 모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수집하고자 하는 것에 돈이 아무리 많이 들고 희생이 크더라도 기끼어 바친다. 그들은 미쳤으니까! 경제적인 목적 때문에 하는 사람. 철저하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다. 앞서 말한 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팔고 싼 값에 사는 중개상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람은 전자다. 최근 한국에는 부자 되는 것에 온통 관심이 쏠린 탓에 후자인 사람도 있을 법하다. 이 책에 흥미를 느낀 사람은 전자일 테니, 후자는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게 넘겨 드리고자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 종류가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책 수집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내가 그렇다. 책 읽기는 거의 안 하고 오직 책을 사서 모으는 데 바쁜 사람. 장서가로 불린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희귀본을 찾는 기쁨에 취해 산다. 가끔 볼 수 있다. 독서를 좋아하면서 책 수집에도 열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장 적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많아야 그럴 수 있기에. 범우문고 192 [애서광 이야기]는 둘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1. 옥타브 유잔느 [시지스몬의 유산] 갖고 싶은 책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미칠 수 있을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상상의 끝까지 가 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어 보라. 책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여자와 책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남자의 대결. 책이여, 어서 사라져라. 죽어라. 없어져라. 책을 파괴하라. 서재에 쥐를 풀어 놓는다. 서재 지붕 기왓장을 부셔 놓아 비가 들이치도록 한다. 습기 가득하다. 곰팡이가 피어나고 좀벌레가 번성한다. 책을 살리자. 적들을 막아라. 고양이를 풀어라. 지붕을 고치자. 불을 피워 습기를 없애자. 마침내 여자는 항복하고 남자는 승리에 취해 서재로 들어가 보는데...
2. 귀스타브 플로베르 [애서광 이야기] 애서광은 자존심이란 어떤 것일까. 미친 분들의 최고 경지란 어떤 것일까. 그는 죽음을 초월한다. 사형선고, 우습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을 소장하고자 하는 미친 사람의 열정.
3. 스테판 츠바이크, [보이지 않는 수집품] 장님. 인플레이션. 수집품. 텅빈 화첩에 쏟아내는 예술 사랑. "아무런 기쁨도 없는 혼탁한 이 시대에 순수한 열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영혼을 환히 밝히는 완전한 예술에 전향된 무한한 기쁨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네가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143쪽)
우리는 미친 사람을 좋아한다. 제대로 미친 사람을 사랑한다. 황홀한 열정에 열광한다. 수집가의 수집품이 아니라 그 수집품이 전하는 수집가의 그 순수한 열정에 우리는 흐뭇해진다. 그 열정에 매혹된다.
글쓰기의 기쁨 롤프-베른하르트 에시히 지음 배수아 옮김 주니어김영사 펴냄 2010년 발행 절판
작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일화와 사례를 모은 책이다. 무려 2년이나 걸려서 모았다. 거의 전세계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충고와 고민은 물론이고 문학 작품 출판 관련 이야기까지 담겨 있다.
안 세 봤는데, 책표지 문구의 주장에 따르면 무려 218명이나 되는 작가가 수록되었단다. 책 끝에 색인으로 붙은 작가 목록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 하인리히 게스너부터 아테네 폰 드로스테 휠스호프까지, 우리나라 독자한테는 생소한 작가가 많다. 당연하게도 한국 작가는 없다.
읽어 보니, 글쓰기는 원칙이라 할 수 있는 게 없다. 각자의 상황과 취향에 맞게 쓸 뿐이었다. 좋아 보인다고 내게 어울리는 게 아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쓸지 고민해 본다.
왜 썼냐?
페터 빅셀은 운동신경이 둔해서란다.
린드그렌은 작가가 될 마음이 없었다. 딸 아이가 갑자기 "엄마, 삐삐 롱스타킹 얘기 해 줘요." 하고 졸라서 간단하게 즉석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후 사고로 누워 지내야 했는데, 본격적으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써낸다.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의 모험'은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썼다.
트루먼 카포티는 남들과 자신이 다르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너무나 남들과 달랐습니다. 훨씬 지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주의력도 대단했죠. (중간 생략) 아무도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비슷하게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거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글을 쓰게 된 강력한 동기입니다. 최소한 종이에는 내 인식과 사고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썼냐?
존 어빙은 노력파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타고난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나는 다듬는 일을 잘할 뿐이다. 단 한 번에 멋진 문장이 완성된 채로 광채를 번득이며 머릿속에 떠오른 적은 결코 없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잘 고치고 다듬을 수 있는지 확실히 배웠다. 그래서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대한 작가'는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나보코프는 말한다. "작가에게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이야기꾼, 교사 그리고 마법사. 훌륭한 작가란 이 세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마법사이다. 마법사의 성격이야말로 그 작가를 훌륭한 작가로 만들어 주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계획한 대로 쓸 수 있는가? 계획대로 된다면 계획만 세우면 된다. 세상 일이 그리 쉽게 풀리던가. 계획과 달리 이야기가 써져서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계획과 즉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리라.
그라스는 소설 '양철북' 계획을 여러 번 수정했다. "실제로 글을 쓰다 보니 그 계획은 사실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도 그 계획서가 공헌한 바가 있기는 했다. 첫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그리고 세 번째 원고 뭉치까지 내 서재를 덥히는 불쏘시개가 되어 난로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래도 추리소설은 계획대로 써야 하지 않을까. 레이먼드 챈들러의 대답은 단호하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습관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단다. "내 소설은 계획으로 나오지 않는다. 내 소설은 스스로 성장한다. 성장하는 도중에 서로 상치하는 게 생기면 도려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쓰기 시작하다." 계속 수정하고 바꾸고 고쳐 썼다.
잘 쓰면 잘 팔리나?
멜빌의 '모디 딕'은 발표 당시에 독자들이 대놓고 외면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멜빌이 쓴 것이라면 이제 아무것도 읽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글쓰기가 그렇게 좋은가? 완벽주의 글쓰기는 인생의 저주인가 축복인가. 매일 낮 1시부터 밤 1시까지 내내 글만 쓰는 삶이라니, 감옥이고 지옥이지 않은가?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기쁨으로 하루 10시간을 홀로 지냈다. "내 심장은 기쁨으로 크게 뛴다. 나는 글을 쓰다가 스스로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모를 때가 있고, 멋진 아이디어와 그것을 표현한 근사한 문장에 흥분해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그것을 생각해 냈다는 충족감이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한다."
가장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작가 이야기는 칼 마이다.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독자만 아니라 작가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칼 마이는 올드 샤터핸드라는 영웅을 만들어냈는데,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고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하게 되었고, 작가조차 자신을 일명 올드 샤허핸드라며 떠들어댔다. 수십만의 팬들을 거늘였던 작가는 진실이 드러나자 몰락한다. 그 멋진 모험 여행담이 사실은 죄다 거짓말이었다. 소설이고 상징적인 의미였다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소설 제목 이야기가 재미있다.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처음 제목은 '제기랄, 죽었잖아'였다.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처음 제목은 '팬시'였다. 그 다음 제목은 '이정표'였으며 '음매, 음매, 검은 양'으로 바꾼다. 최종은 다행스럽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이 제목 아니었으면 이 소설은 정말 말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으리라.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흥미진진한 책이다. 비록 '글쓰기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어도 구경할 수는 있다.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 아서 C. 클라크 지음 -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펴냄
작가의 튼튼한 과학 지식으로 쓰여진 SF라서 허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외계인에 의해 인류가 진화되었다는 독특한 가정이 이 소설의 재미다.
SF라고 하면 괴상한 외계인이 나타나 그에 맞서 우리의 영웅 인간이 싸워 이겨 마침내 우주의 평화가 찾아온다. 괴상한 모양의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거나 우주 전쟁을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류의 활극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서 클라크의 이 작품은 그런 게 없다. 이 소설에는 괴상하게 생긴 외계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묘사되어 있지 않다.
소설의 시작은 파충류의 시대가 끝난 시기에 지구다. 인간 원숭이들은 배고픔에 허덕인다. 어느 날 그들에게 이상한 돌(선돌)이 나타난다. 그 돌은 바로 외계인 설치한 것이다. 그 돌은 인간 원숭이들 중에서 몇 명을 골라 도구의 발명을 시키는 등 문명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인류는 혹독한 환경에서 승리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그 도구는 인간 자체를 위협하는 무기로 바뀌었다. 곧 핵무기.
인류가 달에 정착한 시기.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대립은 여전하고 국경선도 여전하고 핵무기의 위협도 여전하다. 프로이드 박사는 달 기지에 이상한 물체를 조사하러 달로 간다. 달의 중심에 있는 타이코 분화구에 있는 TMA-1(앞에 말한 선돌과 같이 인류를 가르치기 위해 외계인이 설치한 물질)이다. 그것을 조사한 결과 3백만 년 전에 있었던 물질이었다. TMA-1은 빛을 받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전자 굉음을 낸다.
디스카버리 호가 토성 탐사를 위해 떠났다. 그 우주선에는 깨어 있는 폴과 보먼, 그리고 동면 상태의 우주인이 있다. 또 '할 9000'이라는 컴퓨터가 우주선을 통제한다. 동료를 잃는 어려움을 겪고 토성에 도착한 보먼은 토성의 띠 중 유난히 반짝이는 제이페투스에 도착해서 TMA-1과 비슷한 물체를 발견한다. 보먼은 끝없는 심연을 빨려 들어가고, 초우주의 세계를 경험한다. 창조자(외계인)에 의해서 그는 영원의 순간을 지나 아이(스타 차일드)가 된다. 그는 핵폭발로 인간의 역사를 마감시키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한다.
핵폭발에 의해서 인류가 우주에서 사라진다는 결말은 아마도 이 작품이 냉전 시대에 쓰여진 탓이리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 중국이 작고 빈곤한 나라들에게 핵무기와 발사 장치를 판매한다.
우리 스스로가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발달한 외계인이 인류 문명의 탄생과 종말을 좌우한다는 작품 전체의 전제가 놀랍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독자가 실제로 우주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작가의 과학 지식과 글재주 때문이리라.
The unknown is always mysterious and attractive." (未知의 것은 언제나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내 엣센스 영한 사전 표지에 써 놓은 영어 구절 중에 하나인데, 아마 고등학생 때 맨투맨 영문 독해 하다가 마음에 들어서 써 놓은 모양이다. 낭만주의는 아마도 미지의 것에 대한 상상일 것이다. 그것이 공포이건 환상이건 간에. 이미 다 아는 것에는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어렵다.
뛰어난 작가들은 일상에 그 흔하디 흔한 것을 새로운 눈과 느낌으로 표현해서 감동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너무 예외적인 경우다. 사람들은 달에 아무것도 없다고 밝혀지자 달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달은 달콤한 상상이나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달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지구와 가까운 화성과 금성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 그런데, 그의 대안 없는 문명 비판이 그 아름다운 상상을 가끔 버려 놓는다. 그의 상상은 꼭 그 문명 비판을 배경으로 깔거나 대안 없는 공허한 환상으로 채운다.
'화성 연대기'는 SF라고는 하지만, 문명 비판을 위한 우화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화성에 도착한 지구인은 화성인한테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작가의 신랄한 지구 문명 냉소는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火星 年代記. 말 그대로 1999년부터 2026년까지 여러 사건들이 화성에서 일어난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 과학 발달의 속도를 지나치게 빠르게 생각했다. 허긴 나도 어려서는 서기 2000년이 오면 달나라로 소풍 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화성에 인류가 발을 디디려면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웃긴 부분은 <2005년 12월 침묵의 거리>. 화성에 남은 유일한 남자와 유일한 여자. 간신히 연락해서 서로 만나는데, 나머지는 여러분이 상상해 보시길. 남자가 불쌍하더라.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화성에 나무를 심어 녹색 혁명을 이루려는 사나이 이야기도 있다. 꽤 감동적이다. 성실만큼 감동적인 것도 없다.
소설 전체를 통과하는 것은 문명 비판이다. 지구는 핵무기와 전쟁으로 희망이 없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 마지막은 그의 노골적이고 대책 없고 무책임하고 황당한 문명 비판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그런 비판은 인류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겠다. 다들 문명 발달에 제동을 걸지 않고 반성하지 않았던 그 시대 상황에 레이 브래드버리는 분명 다른 입장을 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시대 상황에서도 그렇다만.
다음은 이 소설 2026년 10월 1백만 년 피크닉의 일부분이다. "아빠는 지구인의 논리와 상식과, 좋은 정치와 평화와 책임이라는 것을 찾고 있었단다." "그것들이 모두 지구에 있었나요?" "아니 찾지 못했다. 이제 지구에는 그런 게 없어졌다. 아마 두 번 다시 지구에는 나타나지 않을 거다.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소설 마지막은 정말 냉소의 극치다. 화성에 정착한 지구인 가족들. 아들은 아버지한테 화성인이 보고 싶다고 조른다. 아버지는 물에 비친 자신들을 가리키고 바로 자신들이 화성인이라는 알려 주는 역설로 끝을 맺는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 책은 근본적으로 화성이 아니라 지구에 관한 이야기다. 지구에 사는 인간들, 특히 미국인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다.
화성 탐사에 열을 올리는 미국인들에게 내가 한마디하자면, "그런 화성 탐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희들 마음 탐사니라. 세계 평화 운운하면서 무기 장사하는 니들. 인종 차별로 총 들고 싸움박질하는 니들. 인디언을 몰아내고(뭐 거의 대량 학살이지) 멋진 문명을 만들었다고 떠드는 니들. 레이 브래드버리의 경고를 잊지 말지어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화성인은 혹시 인디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Red Planet은 화성이고 Reds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다. 화성에 도착해서 뭔가 세우고 개척하려는 지구인, 그런 지구인한테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화성인의 모습.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소설 곳곳에 보이는 모습이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연상시킨다.
:: The Martian Chronicles - Bradbury, Ray - Simon & Schuster
화성 연대기. 제목 그대로 소설의 각 장을 연 월의 연대기 사건으로 표시했습니다. 목차 대신에 연표(Chronology)가 나오죠. 1999년 1월부터 시작해서 2026년 10월에서 끝납니다. 사건은 단편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적절하게 이어서 나아갑니다. 여러 잡지에 단편으로 기고했던 글을 모으고 앞뒤에 더 써서 이렇게 한 권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 책에는 시대 분위기 두 가지가 어둡게 깔려 있습니다. 전쟁과 검열. 레이 브래드버리가 이 단편소설들을 쓰던 시절이 암담했죠. 핵 폭탄 위협으로 인류가 전멸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시대였습니다. 출판 기록을 보니 1950년 5월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그 유행어 기억하십니까? "지구를 떠나거라." 80년대에 김병조가 만들었죠. 지금도 종종 쓰는 표현입니다. 짜증나는 인간이 보일 때마다 그 말을 하죠. 이 소설은 반대로 짜증이 난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갑니다. 흑인들이 몽땅 화성으로 가고 주부들도 모두 화성으로 갑니다. 지구에 남은 사람은 고집불통인 백인 남자 늙은이죠.
예술과 종교를 무시한 과학과 전쟁에 대한 비난과 조롱으로 가득한 풍자소설입니다. 소설 전반부에서 화성 탐사대가 어처구니없이 죽고 넷째 탐사대가 화성에 도착했을 때는 화성인이 황당하게 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는 사람들이 죽이고 죽네요. 중반부는 지구인의 화성 이주를, 후반부는 지구인의 화성 정착을 이야기합니다.
작가의 주장이 등장 인물을 통해 거침없이 나옵니다. 화가 정말 많이 나셨던 모양이에요. 과학과 종교는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없을까. 제대로 읽지도 않고 검열하는 인간들 죄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매섭죠.
예전에 이 소설의 번역본 독후감에, 대안 없이 문명 비판만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시대에 살면서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기는 무척 어려웠겠죠. 지은이가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며 훌륭한 문명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들에 의해 한순간에 폐허로 변하는 것을 일일이 들어 얘기하는데, 말문이 막히더군요. 반박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계속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화성에 산소가 부족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한 남자가 나무를 심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 놓았죠. 소설 후반부에는 웃긴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후에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남았을 때 과연 결혼할까? 이런 농담 같은 거요.
화려한 환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요. 외롭고요. 적막합니다. 화성이 사막처럼 황량하게 그려졌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있죠.
이 작품의 국내 첫 번역본은 1991년 청담사에서 펴냈다. 당시에는 극소수 독서가들한테만 알려진, 아주 특이하고 무척 희안하지만 잘 읽혀지지도 잘 팔리지도 않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별종들이 읽었다. 주변 몇몇 독서가들한테 권했지만 실제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개들 읽기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다며 불평했다.
청담사 번역자가 민음사와 같은 이현경이 아니라 박상진이다. 당시 책 가격이 3천원이었다. 책이 시집처럼 두께가 얇았다. 싼 가격과 적은 부피로 짐작해서 읽기 전에는 서사시인 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책은 사라졌고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민음사에서 다시 나왔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탈리아 작가 중 가장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이탈로 칼비노의 1972년 발표작이다. 기호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계와 삶의 본질을 환상으로 진지하게 탐구한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의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독자는 신비롭고 이상하고 야릇하고 독특하고 매력적인 칼비노의 언어가 만든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여행한다. 다분히 추상적인 것들을 마치 눈에 보이는 도시로 묘사한다.
칼비노가 만든 '언어' 도시를 보기 위해서는 애를 먹기 쉽다. 기호학적인 면이 두드러진 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사물과 그 이름은 인과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 작가가 마음대로 재구성하고 재편성하여 놓았다. 기존 소설 독법으로 읽다가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리기 쉽다.
환상적인 독서 체험을 위해서는 독자가 노력을 해야 한다. 칼비노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제안만 한다. 이것인 것 같다는 투다. 글에 공백이 많다. 그걸 채우는 것은 독자다. 이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이 걸작을 맛볼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충돌은 매력적이면서 난해하다. 각 도시들은 철학적이면서 우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도시'를 보기 위한 방법을 중간에 가르쳐 준다. 이렇게 해서 독자와 작가의 게임이 시작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놀이처럼 작가가 숨긴 의미를 독자는 작가가 쓴 글에서 찾는다. 여기에 소설 구성의 치밀함이 있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존재하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하기도 한다. 자, 당신은 과연 이런 도시를 볼 수 있을까? 도전해 보라. 상상력을 발휘하면 언어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대단히 산만해보이지만 수학으로 만든 구조물이다. 목차를 보면 설계도가 보인다. 총 9부다. 1부와 9부는 10개 도시를, 나머지 부는 5개의 도시를 묘사한다.
10 x 2 + 5 x 7 = 20 + 35 = 55
55개의 도시들은 11개의 주제(기억, 욕망, 기호들, 교환, 섬세함, 눈, 이름, 죽은 자들, 하늘, 지속됨, 숨겨짐 등)별로 5개의 도시들이 묘사된다.
55 = 11 x 5
이상의 글 구조물은 작가가 독자한테 스스로 맞춰 원하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한다. 페이지를 순서대로 넘기며 읽는 것은 여러 읽기 중에 하나일 뿐이다. 작가가 목차로 제시한 주제의 도시들만 읽을 수 있다. 심지어 55개의 도시들 묘사를 모조리 무시하고 각 부의 앞뒤에 있는 '마르크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만 남기고 스스로 55개의 도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당신은 작가가 된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172쪽) 의미를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해석, 즉 귀다. 작가가 쓴 이야기인 목소리는 독자가 읽는 이야기인 의미와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처음에는 말장난 기호로 만든 도시로 보이나 뒤로 갈수록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도시로 느껴진다. 이 소설이 말하는 도시는 사람들이 천국 혹은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바로 우리 세상임을 깨닫는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8쪽)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2014년 12월 13일, 세 번째로 읽었다. 여전히 술술 읽히지 않는다. 이틀이나 걸렸다. 자유도가 지나치게 높은 게임 같다.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흐르고 나의 상상은 나의 상상대로 달린다. 처음 읽었을 때 읽기 너무 힘들었던 것을 이제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었다.
:: 캔자스의 유령 The Phantom of Kansas - 존 발리 지음 - 안태민 옮김 - 불새 펴냄
과학소설이 재미있다고 하면, 대개는 그 과학적 상상력의 재미를 뜻한다. 존 발리의 단편소설은 거기에 하나를 더했다. 수수께끼. 궁금증을 유발한 후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한다. 미스터리 수법을 쓰기 때문에 진짜 재미있다.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 읽을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써 놓았다.
'캔자스의 유령'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흥미로운 미래사회 설정을 보여준다. 은행의 주업무가 돈이 아닌 사람의 기억을 저장하는 일이다. 사람들을 사실상 거의 영생을 산다. 육체에 저장된 기억을 넣어서 계속 사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계속 죽이려는 자가 있다. 이미 세 번이나 죽였다. 그때마다 육체를 갈아타서 살아나긴 했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 폭스는 과연 범인 누구이고 왜 그러지는 알아내고자 한다.
미래 과학 상상력을 빼고 보면, 빼어난 미스터리 소설이다. 이 소설이 기존 추리소설보다 재미있다. 독특한 미래 사회 설정 때문에 기존 추리소설의 수사수법으로는 범인을 잡을 수 없다. 육체개조가 가능하기 때문에 지문도 성별도 의미가 없다. 그나마 유일한 신분 확인 방법은 유전자 검사뿐이다. 과연 범인은 어떻게 잡아야 할까?
작가 존 발리는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추리소설의 규칙과 명칭을 가져다 비틀어 표현한다. 후만추, 모리아티가 인용된다. 중앙컴퓨터가 셜록 홈즈처럼 말한다. "유의미한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자료가 축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는 질문은 언제나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게다가 '붉은 청어'라는 용도도 나온다.
짐작했던 자가 범인이라서 김이 샌 상태에서 계속 읽었는데, 이야기 후반부에서 인간적인 컴퓨터의 모습에 놀라 감탄했다.
'공습'은 미래사회의 사람들이 시간여행을 이용해서 과거 시대의 추락 직전 비행기에 공습해서 사람들을 납치하는 이야기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1989년 영화 4차원 도시(원제 밀레니엄 Millennium)는 이 단편소설의 상황을 가져다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어 버렸다.
'역행하는 여름'은 한 사람당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미래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에게 누나가 있는지 그 의문을 푸는 이야기다. 핵가족과 기존 가족 제도에 유쾌한 웃음 한 방을 선사한다.
'블랙홀, 지나가다'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와 음란소설의 과학소설 버전이다.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우주 미아가 되어 버린 남자가 여자의 지혜로 구조된다는 이야기다. 성교를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나름 웃긴다.
'화성의 왕궁에서'는 화성 탐사를 하러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생존 투쟁 끝에 화성 개척민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탐사대는 화성에서 태양계 행성 궤도와 움직임을 재현한 기계 모형을 발견하는데... 화성인에 대한 긍정적이고 참신한 해석이 돋보인다.
2024년 2월 26일 현재 서점에서 새 책으로 구할 수 없다. 전자책으로 나와 있지도 않다. 헌책을 구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을 수 있다.
책 표지가 논란이다. 사형 폐지론 옹호론을 논하는 진지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소설과 달리, 무슨 동화책 느낌이다. 첫인상은 그랬다. 안 어울린다고 여겼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표지에 나온 각 사물들은 소설 내용의 핵심에 해당되는 것으로 잘 표현된 것이었다. 그래도 표지는 아동용 도서처럼 보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료하다. 거의 멈추지 않고 빠르게 읽힌다. 별 꾸밈이나 수식이 없다보니, 문장 읽는 맛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체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프롤로그의 두 남녀 연애는 뭘까 싶었더니, 역시나 결말과 결정적으로 이어지는 힌트이자 암시였다. 시작의 궁금증 때문에 끝까지 읽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 도대체 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추리소설의 기본에 충실한 설정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살인자의 주변 지인과 살해된 자의 친인척이 어떤 고민과 고통, 혹은 어려움을 겪는지 워낙 잘 써 놓아서 소설이 아니라 심층 뉴스 기사처럼 읽힌다. 아마 이 점 때문에 2014년에 나온 책이 꾸준히 출판되어 나오는 것 같다. 스테디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사형 폐지론 논란은 딱히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진 않는다. 그리고 역시나 딱히 정답이 없어 보였다. 흥미롭고 새로운 점은, 각 사건별로 사형할지 여부를 잘 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범인의 범행이 단지 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부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살인범이 사형을 바라기도 한다.
살인한 자는 사형 혹은 무거운 죄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이를 실현/실천하려는 사요코는, 원리주의/원칙주의자의 한계/실패를 보여준다. 소설의 결말은 상식과 감정에 따른 약간의 해피엔딩이었다. 현실상으로는 살인했다고 무조건 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죄가 입증되어야 죄를 받는다.
자신의 과거 죄로 인해, 거의 성인의 경지(노인의 관점/평가에 따르면)에 오른 의사 후미야는 묘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죄가 없었다면, 과연 그가 그정도까지 선행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반면,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유지한 사오리는, 죄 때문에 더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사형이든 죄든 과거든 각 사람마다 각 상황마다 다르게 적절하게 판단해서 다뤄야 한다.
비약한 전개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일 것까지야 싶은데, 각 인물들의 고민과 생각은 공감이 가고 안타까웠다. 작가 히가시노가 이야기에 신파적인 면이 있긴 해도, 인간 감정의 핵심을 잘 짚어서 보여준다.
소설 '공허한 십자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긴장감이 덜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나름 감동의 깊이는 있다. 읽어 볼만한 소설이다.
스티븐 킹. 역시 대단한 작가다. 자신의 기존 소설 분위기를 완전히 버리고 정반대로 써냈다.
스티븐 킹 하면 아무래도 기존에 쓴 소설들의 영향 때문에 뭔가 흥미롭고 기이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그의 대표 장르가 공포소설인데, 그런 그의 소설에서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일이 일어나서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존 스티븐 킹의 작품들에 비하면 진행이 평범하다. 독자가 예상한 대로 이야기가 흐른다. 읽다가 놀랄 일이 거의 없다.
킹의 소설은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거의 끝에서 터트린다. 그래서 스릴과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책 '빌리 서머스'는 안 그랬다.
'빌리 서머스'는 기존 스티븐 킹과는 완전 반대인 소설이다. 심지어 기존 암살자 킬러 소설과도 거리가 멀다. 뭔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건과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잘 쓴 소설에 영어권 독자들이 종종 별표 하나짜리 평을 붙인 이유는 그래서다.
1권까지 읽었을 때는 앨리스의 등장이 생뚱맞았는데, 2권까지 읽어서 이야기의 끝을 보니 앨리스는 반드시 등장해야 할 인물이었다. 앨리스가 없으면 이야기가 완결되지 못한다. 이야기가 안 된다.
컬러와 살인이 등장하는 소설인데도, 그 어떤 과장도 기발한 트릭도 없다. 소설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으로 진행된다. 그 범죄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같은 것조차도 없다. 소설 중간에 성폭행을 당한 앨리스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 외에는 딱히 극적인 사건이 없다. 이래서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없다. 당신의 선호, 혹은 이 소설에 대한 기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문학 평론 혹은 해설이 있어야 할 만큼 난해하거나 어려운 소설은, 물론 아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이걸 로망 아 클레라고 생각할 거야. 프랑스어로 실화소설이라는 뜻인데, 그 친구한테 배운 단어야." 383쪽.
스포일러가 될 결정적 사건만 제외하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압축해 보면 이렇다. 킬러 빌리 서머스는 성폭행 당한 앨리스의 복수를 해 주고, 암살을 의뢰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당사자를 찾아내 마무리한다.
소설 '빌리 서머스'는 핍진성의 끝판왕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서 우와 재미있네 하는 독자보다는 이야 이거 정말 진짜 같다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흔한 해피엔딩을 하나 보여준 후에 그것과는 다른, 실제로 벌어진 일을 서술한다. 픽션의 픽션으로 처리한다.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다. 빌이 쓰던 자전소설을 완성한 앨리스는 이런 말을 한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슬픈 걸 잊을 수 있었어요.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었어요. 여기가 어딘지 잊을 수 있었어요. 그럴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아저씨랑 같이 아이오와주 데번포트 외곽의 바이드 어 워 모텔에 있는 척 할 수 있었어요." 417쪽
책을 읽다가 '오버룩 호텔'이 등장해서 뭐가 초현실적이고 기괴한 일이 일어나길 바랐던 나는, 아무래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잔잔하게 내 가슴으로 스미는 감동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로서는 반전이었다.
"버키의 말에 따르면 귀신이 들렸다던 호텔이다. 호텔을 보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산소 농도가 낮은 고산 지대는 처음이라 허깨비를 본 게 분명하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중간 생략) 바이드 어 워 모텔을 내가 만들었던 것처럼 그 호텔이 저기 있다고 설정하면 돼. 내가 설정하면 돼. 원하면 그 안을 유령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어." 419쪽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 해피엔딩 버전이었다. 정말 나쁜 놈만 죽인다고 왜 그렇게 반복했는지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흔한 장르소설의 클리셰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좋은 결말, 이야기의 진정한 결말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는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닉과 조지에게는 빌리 서머스라는 청부살인업자다. 제러드 타워의 입주민들에게는 데이비드 로크리지라는 작가지망생이다. 미드우드의 에버그린 가 주민들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이제 제러드 타워에서 아홉 블록, 미드우드와는 안전하게 6.5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는 피어슨 가에서는 돌턴 스미스라는 과체중의 컴퓨터 덕후다. 생각해 보니 네 번째 인생도 있다. 빌리가 평소에 외면하던 고통스러운 과거를 대면할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빌리를 닮지 않은 벤지 콤슨." 157쪽
흔한 범죄소설(저격수 킬러 주인공 소설)의 이야기를 예상했는데, 첫 문단부터 주인공이 겉으로는 싸구려 대중 만화책을 읽는 척하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학 독자로 나와서 이건 뭔가 싶더니, 소설 쓰는 킬러다.
문장은 하드보일드 건조체다. 수식이나 꾸밈이 없다. 스티븐 킹 특징인 비속어가 거침없이 나온다.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작업 중이던 문서를 열고 과거 속으로 뛰어든다." 184쪽
킬러가 작가로 위장해서 저격 위치 근처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글 쓰는 일에 열중한다.
1권 이야기는 킬러의 마지막 암살 저격(주인공의 현재)과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쓴 소설의 창작 과정(주인공의 과거)을 다룬다.
빌리 서머스는 총 2권이다. 1권까지는 평범했다. 저격 완료하고 위장 신분으로 숨어지낸다. 딱히 우와, 혹은 재미있다 싶은 장면은 없었다. 1권 말미에 클리프행어가 있다.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402쪽 1권 마지막에 성 폭행당한 여자 앨리스 구하기는 뜸금없었다. 갑자기 왜?
소설로 쓰는 주인공의 과거가 뭔가 특별하거나 흥미로울 거라 예상했지만 평범했다. 2권에서 뭔가 대단한 반전이나 한 방이 있을까?
드디어 원서를 구입해서 읽어냈다. 안 졸렸다. 어린이 책이지만 역시 원서라서 읽기 만만치 않았다. 물론 어른용 소설책보다는 쉬웠지만 말이다.
시험용 영어 단어만 잘 알고 있으니 시험에 안 나오는 영어 단어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장 구조가 간결하고 쉬운 편이 아니었다. 밀른은 수필에서건 소설에서건 그 특유의 장황한 농담을 하기 때문에 길고 종종 꼬여 있고 뒤틀려 있다. 동화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위니 더 푸 이야기는 숲 속 동물 이야기로만 알았다. 곰, 토끼, 당나귀, 부엉이, 돼지, 캥거루. 나오는 캐릭터가 동물이니까 동물 이야기 맞잖아?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봐도 큰 문제는 없지만, '위니 더 푸'는 장난감 이야기다.
'위니 더 푸'는 동물 장난감 이야기다. 동물 인형이 말을 하고 움직인다. 우리가 아는 그 '토이 스토리'는 아니다. 장난감끼리만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밀른은 아이의 상상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이 이야기는 말짱 거짓말임을 시작과 끝에 명백하게 밝혀 놓았다. 작가 자신의 아들이 등장해서 곰인형을 데리고 쿵쿵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시작이고 다시 인형을 데리고 쿵쿵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끝이다. 아이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자 밀른은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이 가지고 놀던 동물인형 장난감들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밀른답게 밝은 웃음과 여유로운 농담이 따사로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연필 강도를 뜻하는 B, HB, BB로 이야기 끝까지 웃겨준다. 썰렁 개그인데도 분위기가 워낙 따뜻해서 춥진 않다.
총 열 편의 짤막한 이야기들이 연재 형식으로 이어져 나온다. 멍청한 곰 푸의 위대한(?) 모험 이야기랄까. 우울한 당나귀 이요르의 꼬리를 찾아다 주고, 불어난 강물에 둘러싸인 겁많은 아기돼지 피글렛을 구출한다. 북극(?) 탐험에도 나서 정복(?)한다. 곰돌이 푸는 나름 시인이라서 시를 지어 주변 이들한테 들려준다.
그 유명한 호랑이 티거는 이 책이 아니라 후속작 The House at Pooh Corner에 나온다. 밀른이 이야기로 쓴 책은 그렇게 딱 두 권이다. 나머지 두 권은 시집이다. 푸 이야기 책이 하나 더 있는데, 이는 밀른이 쓴 게 아니라 저작권자 허락을 받아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위니 더 푸는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빨간 셔츠를 걸친 것은 디즈니 만화영화에서부터다.
한글 번역본에는 작품 탄생 배경과 실생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라서,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
작가 밀른이 동화 장르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정도였으니. 책 잘 팔리고 유명해지면 작가와 작가 가족들한테 좋고 행복한 거 아닐까. 아니었다. 성공이 곧 행복은 아닌 모양이다. 차라리 발표하지 않고 아들만 읽을 수 있게 두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성공이 불행과 재앙을 가져왔다.
밀른이 정말 잘 쓰는 장르는 수필이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가져다가 기가 막히게 재미있게 써낸다. 그의 독특한 유머는 어느 장르에서든 밝고 따스하게 빛난다.
참, 번역본은 주석을 달아 영어 원문에서 어떻게 썼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전자책으로 읽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컬러 삽화가 있다.
장편소설 <조율사>는 이청준이 월간 '사상계'사에 일할 때 초고를 썼고, 그 후 1971년 계간 <문학과 지성>지에 발표했다. <작가의 말>로 봐서, 이 소설은 분명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 무기력한 현실에서 글을 못 쓰고 방황하는 젊은 소설가의 고뇌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억압받는 사회 현실에서 문학도들인 시인 송 교수, 비평가 지훈, 소설을 쓰는 팔기와 기형, R일보 문화부 기자인 김형, 그리고 나는 손님이 별로 없는 기적(汽笛)에서 문학 이야기나 결론도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송 교수가 그들에게 편지 하나를 남기고 돌연 그 모임을 떠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는 지금 조율하는 사람들로, 어느 특정인(정치가, 독재자,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 때문에 연주(작품 발표)를 하지 못하고 계속 조율만 하다가 결국 연주자가 아닌 영원한 조율사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후, 그들은 조율이라는 은어(隱語)를 쓰면서 만난다. 그런 조율만 신경 쓰던 중 비평가 지훈이 연주를 한다. <비극적 지식인론>이란 제목으로 지식인의 실천을 강조하며 나태한 문학인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 나는 글도 안 써지고 애인도 떠나고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단식을 시도하는데……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비평가 지훈이 쓴 <비극적 지식인론>과 그에 반박하는 송 교수, 그리고 그런 송 교수를 반박하는 주인공의 진지한 문학론이었다. 작가가 진정 외치고 싶었던 소리였으리라.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서의 창작 행위란 무엇인가? 작가는 단순히 시대 의식을 표현하는 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사회적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가. 진정한 문학은 무엇인가. 세월이 지나도 물음은 그대로다.
몇 년 전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 주말의 영화를 보려고 TV를 켰다. 영화 제목은 스모크였다. 크레딧을 보았다. 웨인 왕 감독이군. 난 보기로 했다. 시나리오, 폴 오스터. 폴 오스터가 원작이다! 보자.
영화는 폴 오스터의 이야기 그대로였다. 인종화합, 거짓말, 우연, 사진찍기 등. 그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웨인 왕 감독은 사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영상으로 잘 표현한다. 그래서, 딱히 볼거리가 없고 등장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중시한 폴 오스터의 시나리오는 웨인 왕과 잘 어울렸다.
이제서야, 그 영화 [스모크]의 원작소설을 읽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짧은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작가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신문에 꾸며진 이야기를 싣는다"(29~30쪽)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단편은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그가 드디어 이 소설을 쓴다. 생각의 꼬리는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쉼멜페닉스라는 시가 상표, 그 시가 깡통, 그걸 샀던 브루클린 가게, 그 가게 점원.
사실성 확보를 위해, 액자 소설 형식을 취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오기 렌으로부터 들었다."(13쪽) 여기에 작중 화자 나는 실제 작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 자, 뉴욕 타임스에 실릴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려 하고 있다. 해서, 나는 평소 친했던 오기 렌한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나 들려 달라고 하자, 오기 렌은 실화라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오게 렌은 똑같은 장소와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앵글로 날마다 사진을 찍어 앨범으로 묶어 놓은 걸 소설가 폴한테 보여준다. 그 흔하디 흔한 일상 풍경이 날마다 조금씩 바뀌는 모습, 그리고 사람들의 변화, 세월의 변화. 그 미묘한 변화를 보는 이상야릇한 기분이란! 정말 좋은 영화/소설은 사람들한테 삶의 의미를 묻는 거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문득, 사진이 찍고 싶다. 일상 생활을 사진에 담고 싶다.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흔적이 있는 일상 풍경 말이다.
이 책은 송파 도서관에서 빌려 봤다. 이 책 맨 뒷장에 누군가 이런 글을 연필로 써 놓았다.
사진은 흐릿하지만 고정적일 테고 움직임은 멈춰 있어 그 어느 것도, 내 존재나 내 비존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삶 이전, 그리고 내 눈앞의 하늘만큼이나 가깝게 있는 삶 이후의 무한한 부동성이 있을 것이다.
-- 사진기, 장 필립 뚜생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재미는 이런 거다.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오늘 이 책을 반납하고 [동행]과 [스퀴즈 플레이]를 빌렸는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같은 손글씨로 책 맨 뒷장에 글이 있다. 이번엔 사인펜이다.
'레몽 장'이라는 프랑스 작가는 영화 <책 읽어 주는 여자>로 국내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영상 시대! 국내에 번역된 레몽 장의 작품은 <책 읽어 주는 여자>와 <벨라 B의 환상>이 있다. 앞의 책은 세계사에서 나와 있고 뒤의 작품은 프랑스 6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현대문학 펴냄)에 있다.
<카페 여주인>은 <책 읽어 주는 여자>처럼 야하다. 자기 몸매와 외모에 도취된 여자 화자(話者)를 내세운다. 또, 엉뚱하다. 시골 카페의 여주인, 아멜리에게 황당한 내용의 편지가 배달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다음이 그 편지다. "친애하는 부인,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와 하룻밤 동침해주신다면 그 대가로 10만 프랑을 지불할 것을 제안합니다. 부인은 저를 틀림없이 대담하고 몰상식한 사람이라 생각하시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제안을 드렸으며 이를 지킬 것입니다. 저의 가정 다정한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이야기 전개는 작가 특유의 야하고 웃기고 읽기 쉬운 문체로 흐른다. 호기심을 계속 자극시켜서 끝 쪽까지 읽게 한다.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이다. 머리 식힐 겸해서 읽었다.
이 소설책의 후반부를 읽고서, 쟈송의 태도가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그 여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 더 많은 쾌락을 준다. 현실보다는 상상한 현실이 더 매력적이기에. 때로는 상상한 것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도 있으니까. 언어와 상상력의 힘을 믿는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