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 속지들 마라.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도 혀를 내둘렀다는 심리 트릭으로 유명하다." 유명 소설가 이름 팔아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의심부터 해야지, 그걸 믿냐.
제목 '황제의 코담뱃갑'이 결정적 힌트다. 범인이 누군지 당신은 알 수 있다. 왜 어떻게는 몰라도 누군지는 단숨에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먼 거리에서 그게 그거라는 안다는 게... 쉬. 더는 말하면 안 되겠지. 간단한 추리퀴즈 단편이었으면 괜찮을 텐데, 장편으로 늘리며 질질 끌다보니 사건 얘기를 계속 반복한다. "살인범의 정체를 알려주셨습니다." 아, 범인이 얘라니까, 얘라고. 거참, 이 사람이라고!
막장 드라마 전개 속에서 독자가 못 맞추게 하려고 아주 생 쇼를 해서 짜증이 났지만, 마지막 해피엔딩 로맨스로 모든 것은 용서되었다. 지지폼폼. 네 죄를 사하노라.
'유다의 창'을 읽고 기대치를 너무 높였다. 알고나면 시시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불가능한 범죄를 선보인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존 딕슨 카 추리소설이 맞다. 범인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무슨 텔레파시 살인도 아니고 이건 불가능해. 저 건너편에 보이는 사람은 뭐냐고. 살인자가 티임머신을 타지 않은 이상에야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막장 드라마 이야기 싫은 사람은 딱히 안 읽어도 손해는 아니다. 시간 낭비 안 하고 다른 좋은 작품 읽기 바란다. 존 딕슨 카 작품 찾아서 읽을 정도면, 이미 유명한 추리소설 수작들은 섭렵했을 거라 짐작되지만. 그러니까 셜록 홈즈 전집과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은 다 읽었겠지.
그랜트 경감이 처음 등장하는 소설이다. 미남이고 경찰처럼 안 생겼고 기본적으로 증거와 사실을 중시하지만 자신의 감도 믿는다.
극장 대기 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분명 살해된 자의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의심스러운데... 어쨌거나 범인은 살해된 자의 앞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살인을 했는지 좀처럼 알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살해당한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살해한 사람을 체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희생자의 신원이 밝혀지기 전에 살인자가 잡힐 지경에 놓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당한 상황. 여전히 왜 그가 살인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살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든 증거는 그를 살인자로 봐야만 하는데, 감은 그가 아니라고 한다.
실망했다. 아, 너무했다. 그랜트가 계속 헛다리 짚고 계속 잘못 추리한다. 범인이 자수해서 자백해서야 사건이 해결된다. 이것은 추리소설 장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독자가 범인이나 범행을 예측할 수 없도록 거의 후반까지 허탕치게 할 수는 있어도, 사건 해결이 탐정/경찰 주인공이 아닌 범인 자신의 자수로 되는 식은 정말이지 아니다. 자수하는 동기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세상에는 분명 착한 사람이 있다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빼어난 문장력으로 목가적 풍경화를 그려내고 생동감이 넘치게 인물들을 묘사하며 성실하게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발군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루하고 심심하고 착해서야.
"참 희한한 일인데 그 사건에는 악한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아." 그렇다. 조세핀 테이는 첫 작품부터 코지 미스터리를 지향했다. 번역 제목은 줄 살인사건이지만 원서는 Man in the Queue, 줄에 선 남자다. 착하다 착해.
'프랫 패러의 비밀'은 조세핀 테이 소설 중에서 드물게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중후반부터는 끝이 궁금해서 읽기를 멈추기 힘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추리소설답다. 범죄 미스터리 장르에 부합하게 잘 만든 소설이다.
소재는 흔하고도 유명한, 부잣집 유산을 가로채기 위한 신분 사기다. 그런데 중반에서 살인 미스터리로 바뀌더니, 후반에는 대결 구도로 전환시키고, 결국에는 모든 의문을 해결한다. 그리고 어느새 해피엔딩에 이른다.
혼잣말을 통한, 세세한 심리 묘사. 마치 오늘 만난 이웃을 보는 듯한, 생생한 인물 묘사. 어제 내가 했던 친구랑 수다를 연상시킬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 여기에 과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살포시 전개하는 로맨스까지. 다른 작품에서처럼 폭소를 자아내는 유머는 아쉽게도 이 소설에는 없었지만, 자잘한 농담과 깨알 우스개는 여전히 선보였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이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때 초반까지만 읽고 말았었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완독했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초반을 넘기자 중반부터 환상적인 미스터리가 전개되었고 아름다운 끝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존 딕슨 카의 소설인데, 법정물이다. 공포소설 분위기 전혀 없다. 유령, 귀신, 마녀, 마법. 그딴 거 하나 없다.
밀실이다.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읽은 정통 미스터리 추리물이었다. 셜록 홈즈랑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다 읽어 치운 독자들한테는 빛과 소금의 소설이다.
처음에는 제목에서 오해할 것이다. 유다의 창에서 창은 무기 창이 아니라 창문할 때 그 창이다. 유다의 창은 어디나 있다며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독자를 아울러 약올린다. 있다니까, 유다의 창이라는 게. 그게 뭘까?
밀실 미스터리라면 좋아라 환장하는 사람이 있던데, 나는 조금 꺼리는 편이다. 추리소설의 트릭이야 알고나면 다 시시해지긴 하지만, 밀실 트릭은 그 기대와 실망의 낙폭이 워낙 커서 그렇다. 아, 알기 전에는 얼마나 신기하고 무척이나 흥미로운지. 분명히 작은 구멍 하나 없는 밀폐된 방이건만,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 방 안으로 화살을 쏘아 살인했던 것일까? 알고나면 허무하다.
간단했을 일이었는데, 정확히는 복잡하지 않은 정도다, 착각으로 일이 틀어지면서 운명의 장난이 시작된다.
지미 앤스웰은 그저 복 받은 인생이라고 할밖에. 메리는 지미를 정말 사랑했고, 지미도 메리를 진정 사랑했다. 왜 자꾸만 추리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지.
눈 먼 사랑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2016년 1월 발행 전자책 O 종이책 X
아, 드디어 로맨스소설을 읽는구나! 잉? 아니네. 추리소설이네. '눈 먼 사랑'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는 정반대다. 연애소설을 읽는 줄 알았더니 중반에 추리소설로 바뀐다. 정말 궁금하게 했다. 알고나면 시시해지니까 여기서 언급은 안 하겠다. 시작할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
조세핀 테이는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글 쓰는 솜씨가 워낙 좋은지라 이야기가 이리도 지루한데도 좋아라 문장 하나하나 달콤하게 읽어내게 된다. 이게 말이 되나. 문장은 참 재미있다.
대개들 이야기 초반부를 읽고 로맨스를 기대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독자한테 안기는 것은 미스터리다. 살인은커녕 그 흔한 타박상도 안 보이는 사건이라니.
한 여인을 두고 두 남자가 경쟁하는 삼각구도다. 한쪽 남자는 보는 순간 여자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잘생겼다. 여자는 흔한 미남이고 그래 봐야 사진작가일 뿐이라며 애써 떨쳐내려고 하지만 자꾸만 끌리는 것을 염려할 지경이다. 딱 봐도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인 설계도 아닌가. 이렇게 깔아놓고 실종 미스터리 해결로 마무리를 짓다니. 아, 너무하네 정말.
살포시 웃기는 것은 여전했다. "시도 써요?" "시 안 쓰는 사람도 있어요?" "비근한 예로 나는 안 씁니다." "말도 안 돼요!" "책 써서 돈 벌어 먹고사는 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또 은근 어둡고 심오하다. "평생을 사랑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겠지요."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검은숲 펴냄 2011년 8월 발행 전자책 O
보니까 딱이네. 여자애가 거짓말 하는 거네. 더 궁금할 게 없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더 궁금하지도 않고 더 알고 싶은 것도 없다면 왜 더 읽는가. 어느새 나는 계속 읽고 있었다.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영화 보는데 재미는 없는데 배우가 마음에 들어서 끝까지 다 보는 경우 말이다. 소설책도 그럴 때가 있다.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큰 재미가 없는데 문장이 좋은 것이다.
문장이 좋다. 차분하고 착실하다. 성실하게 나아간다. 인물들을 소소하게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게다사 살포시 우스개까지 얹는다. 이 정도 필력이면 아무리 시시한 이야기라도 읽혀진다. 벼룩 죽이기 대화 장면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실제 있었던 옛날 사건을 순화하고 이름 바꿔서 다시 그 진실을 찾아보자는 의도는 이해했는데, 살인 사건도 아니고 실종 사건이고 드러난 진실도 딱히 놀랍지도 않으니, 심심했다.
마지막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다. 그냥 연애소설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전자책으로 정독했다. 읽기 편해서 좋다. 깨끗하다.
두 번째 읽은 거라서 대충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연애소설로 읽었다. 알콩달콩 달달하니 재미있었다.
조세핀 데이의 유머는 소소하게 은근히 웃긴다. 벼룩 잡기로 이렇게 웃긴다.
"댁도 벼룩을 물에 빠뜨려 죽이나요, 블레어 씨?" "아뇨, 전 눌러 죽입니다. 제 여동생은 비누를 들고 쫓아다니곤 했죠." "비누라뇨?" 사프 부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물렁한 쪽으로 때리면 벼룩이 들러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 참 흥미롭기도 하지. 처음 들어보는 기술인데요. 나도 다음에 한번 해봐야겠군요."
추리소설로서는 정말이지 별 하나도 아까울 지경이다. 결정적 증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식이라니. 주인공이 끈질긴 수사와 뛰어난 추리력으로 해내는 장르 규칙은 따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작가 본인의 분신으로 보이는 인물, 매리언을 통해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는 범인의 어머니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공감과 동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 오랜 세월 같이 살고 사랑했던 사람이 그냥 존재하지 않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큼 더 충격적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렇게 사랑했던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한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고 전에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한테 대체 뭐가 남아 있죠?"
대개의 추리소설, 법정소설에서는 정의실현의 승리감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원고도 피고도 아닌, 범인을 사랑했던 엄마에 대한 동정으로 마무리된다. 그 고통을 강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감동을 조세핀 테이한테서 느낄 줄이야. 예상밖이었다.
이야기는 물론 지루하다. 매번 나오는 그놈의 관상 이야기는 짜증난다. 하지만 인물 묘사력은 명품 도자기 같다. 손으로 작고 알차게 빚은 만두 같은 유머는 맛있다. 나, 이 작가 사랑한다.
덧붙임 : 서양의 현대 마녀 사냥 이야기는 비슷했다. 셜리 잭슨의 장편소설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랑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집이 불타고, 이를 즐거워 하는 주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다른 점은 그들의 최후였다. 잭슨 이야기에서는 마녀들이 계속 거기 살았으나 테이 이야기에서는 그곳을 떠난다.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시 지음 이동윤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2년 7월 발행 전자책 O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시 지음 강영길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로맨틱 코미디다. 본격 미스터리를 바라는 이한테는 실망이겠으나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바란다면 만족이다. 범인이 누군지 그게 뭐 중요한가. 우리의 귀염둥이 커플, 치과 의사 월터 바라노프와 꽃집 아가씨 앨마 웹스터의 코미디를 보고 있으면 살인이 일어나도 별 관심이 안 가더라.
1. 교묘한 복선처리 이 때문에 책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읽게 한다. 프롤로그와 전보문에 소설의 전반을 암시한다.
2. 정확한 시대묘사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인용했다. 여러 풍속을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역사소설 읽는 것 같다.
3. 독특한 인물설정 웃음이 절로 난다. 로맨스소설에 빠져 사는 알머가 귀엽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술술 읽히진 않았다. 동시 다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인물과 사건이 소개되고 전개되다가 배에서 모두들 만나게 된다. 산만하다. 게다가 1920년대 당시 유명 인사(채플린, 화이트헤드, 러셀)와 온갖 고유 명사 삽입은 작위적이다.
작가는 당시 역사적 사실과 온갖 단어를 조합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미에 푹 빠진 듯하나, 독자 입장에서는 별 관심 없고 사건 전개 속도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흔한 범죄 이야기를 가져다 이를 코미디로 바꿔 다시 또 다른 범죄로 바꾼 솜씨가 일품이다. 훌륭하다.
피터 러브시의 미스터리가 다소 지루하고 구식일 수는 있어도 꾸준히 인기를 끌 수 있고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은, 과장된 트릭이나 최신 과학 기술 같은 것을 전혀 끌어들이지 않고 수수께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소하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도 추리소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유머 감각과 역사 풍속 애착은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감이나 따분함을 유발할 수 있으니, 자기 취향에 맞는지 확인한 후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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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시르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앨마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이 동시다발로 나오는 식이었다. 산만하다. 게다가 분량이 이렇게 많았었구나. 통독하려면 어느 정도 끈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4년 1월 발행 전자책 O
영화는 두 번 봤는데, 소설은 처음 읽었다. '힐 하우스의 유령'과 달리, 영상물과 원작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소설이 더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사건 장면보다 글과 말이 더 많으니까. 차이점이 이렇다. 사소하게는, 식탁이 소설에서는 원탁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아니다. 중대하게는, 소설에서 찰스는 죽지 않는다.
일단 흥미를 끌고 궁금케 하는 것은 가족 독살 살인 사건이다. 하지만 큰 기대를 하지 마라.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그저 양념이니까. 추리소설을 읽고자 이 책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죄 미스터리의 제시와 해결이 주된 흐름이긴 하지만, 그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셜리 잭슨의 소설은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읽는다. 몽상, 폐쇄, 광기. 달나라 몽상에 종종 빠지는 여자. 마을 사람들한테 마녀 사냥에 가까운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장편소설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에서의 광기는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을 끝없이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주변 사람들한테 있다.
메리 캐서린 블랙우드와 언니는 자신이 사는 저택을 성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단한다. "우리가 갈 데가 있어? 우리한테 여기보다 좋은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저 밖에 우릴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세상은 끔찍한 사람들 천지인데." 119쪽
이 성에 침입자가 들어온다. 아버지를 닮은 사촌 찰스. 아버지의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쓰고 아버지의 방을 쓴다. 집에 불이 나면서 인간들의 본성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찰스란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돈, 돈이다.
영화도 소설도 기승전결 딱딱 이야기를 제대로 진행했다기보다는, 그저 폐쇄된 공간에서 살면서 끔찍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을 지키려는 두 사람만 부각한다. 영화는 소설이 너무 심심하니까 후반부에 살인까지 더했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비어있고 딱히 뭔가를 완결했다는 느낌이 없다.
드라마와 소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넷플릭스 드라마 '힐 하우스의 유령'은 무서웠다. 정작 원작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은 마지막만 빼고는 내내 하이틴물 읽는 것 같았다. 하나도 안 무섭다. 꿈과 낭만의 소녀가 재잘거린다. 가끔씩 어둡지만 대체로 명량한 분위기다. 유령집 체험 수기 같다. 원조 맛집이 항상 맛있는 것은 아니다. 명불허전이라는데, 그냥 허전했다.
무더운 여름날 공포물을 읽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면, 왜 자신이 연애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동성애 같은데...
나름 미스터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긴 했다. 왜 문이 자꾸만 닫히는지, 왜 집에 있으면 불안한지. 유령 미스터리를 풀어주나. 기대기대 두근두근. 아니었다. 후반부에 박사의 부인과 조수(?)가 와서 플랑셰트 남용하며 맘대로 유령 만들기를 한다.
이 소설은 시작할 때, 이미 끝난 이야기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된 같은 문단이 처음과 끝에 나온다.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35쪽, 368쪽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유령이지 않을까.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듯 사니까. 숨막히는 현실에서 인간은 탈출의 방법으로 몽상에 빠진다. 꿈을 꾼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짜 유령이 된다. 이같은 주인공 앨리너의 광기는 운명이었다. 소설 첫 문장에 예언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갔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35쪽
단편소설이었으면 깔끔하고 인상적이었을 듯 싶다.
작가와 이 소설 주인공이 겹쳐 보인다. "어머니의 기대와 간섭에 반발한 나머지 병적인 공상과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372쪽
4년 전에 읽은 추리소설이다. 읽었던 책은 엘리시르가 아니라 뉴라이프스타일에서 1993년 5월에 펴낸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렸을 당시 책장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옮긴이는 정성호. 제목은 붙여쓴, 밀랍인형.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한 달이 안 된 시점에 책을 받았다. 읽는 중에 누군가 이 책을 대출신청 예약했다고 도서관 카톡 문자가 왔다. 국내에서 러브시는 인기가 제법 있나 보네.
다시 읽어도 결정적인 트릭의 해법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라. 너무 간단해서 허탈했던 기억만 났다. 궁금해서 환장했다. 날도 더운데... 30도가 넘는 여름날에. "나는 독극물 캐비닛의 잠긴 문을 열 수 없었어요.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못 참고 뒷장을 뒤적거려서 해답 339쪽을 봤다. 시시하군. 알고나면 대개 그렇다. 캐비닛 열쇠 미스터리는 밀실 트릭처럼 너무나도 단순해서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을 못 하게 되더라.
이미 풀어버린 수학 문제라도 과정이 재미있으면 다시 풀어 보려고 하듯, 추리소설도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알아도 다시 읽는다. 결과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재미는 과정에 있다.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사형일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다. 6월 25일 월요일. 그리 많지 않은 시간에 과연 정말 이 사람이 살인범인지와 정황상 어떻게 열쇠를 안 갖고서 독살을 해냈지를 밝혀야 한다. 이 대범한 살인자는 자백으로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다. 독극물 청산가리를 보관하는 캐비닛 열쇠의 모순을 수사하는 측에서 알아차릴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 점을, 높은 분이 제보를 통해 알아채고서 수사를 조용히 진행하라고 명령한다. 실력은 있으나 승진은 못 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찰 크리브 경사한테 맡겨진다. 본래 크리브 경사 시리즈에서는 순경 새커리와 함께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혼자서 한다. 배정된 순경이 없기 때문이다. 우직한 경찰. 사건을 해결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한테 딱히 득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한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감옥에 수감된 미리엄 제인 크로머. 이 범인을 처형할 사형집행인 제임스 베리. 자백서의 진위 여부를 철저하게 알아내려는 수사관 크리브. 아무리 봐도 사형집행인 베리는 동떨어진 것 같았는데, 살인범의 밀랍 인형을 전시하는 곳에 들렸다가 아내한테 줄 사진 선물을 위해 사진관에 들른다. 바로 그 사진관이 미리엄 크로머의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다. 오해의 코미디가 발생하는데... [가짜 경감 듀] 분위기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들한테 필독서다. 베티 에드워즈의 이 책은 친절한 안내서라기보다는 실험 연구 보고서 같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경험적 증거를 나열하기에 그렇다. 아마도 자신의 논문이 이 책의 출발이자 바탕이다. 그럼에도, 읽기 쉽다. 실용서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독자한테 해 보라는 주문은, 그리려는 대상을 거꾸로 놓고 그려 보라는 거다. 아니, 똑바로 놓고도 제대로 그리기 어려운 판에, 대상을 거꾸로 놓고 그리라니 무슨 말인가. 직접 해 보라. 해 보면 놀랍게도, 대상을 거꾸로 놓고 그린 그림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해, 더 잘 그렸다. 왜 이럴까?
거꾸로 놓고 그리기에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게 아니다. 거꾸로 놓으면 기존 선입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본 것을 그대로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걸 그린다. 본 것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봤다고 여기는 것을 그린다. 그래서 대상을 그림으로 정확히 옮기지 못한다.
대상을 거꾸로 놓으면 기존 생각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하고 선으로 그려내는 데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하게도 그리는 것이 재미있게 된다. 말 그대로 선입견이 없이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하기 때문에 마치 복사기에 복사한 것처럼 정확히 사물을 그려낸다. 사물을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왼쪽 두뇌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오른쪽 두뇌는 직감하고 느낀다. 왼쪽 두뇌 기능이 멈춘 사람은 마치 잡음이 들리는 라디오가 꺼진 느낌이라고 한다. 비판하는 소리가 침묵한 것이다. 오른쪽 두뇌는 비판도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저 느끼는 대로 그냥 한다. 소위 예술적 감수성이란 바로 이 오른쪽 두뇌다.
이 책에서 다양한 직업에 있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특히, 자화상을 그린 경우가 그랬다. 그동안 자신은 이런 모습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살았는데, 실제로 제대로 자신을 보고 그려 봤더니 다른 모습이였다는 얘기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다.
나는 남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라고 생각하는 나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나를 나로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책으로 자신을 스스로 정확히 그려 보라. 당신의 모습을 정확히 손으로 그려내는 짜릿함은 자아 성찰 이상의 기쁨을 준다. 나를 느낄 수 있기에.
밤 그리고 두려움 2 코넬 울리치 지음 하현길 옮김 시공사 펴냄 2005년 12월 발행 절판 전자책 없음
누아르 소설가 코넬 울리치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편집자가 붙인 제목처럼 밤이 배경이고 인물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을 기대하지 마라. 블랙커피 같은 분위기와 시간 압박의 긴장감을 즐기라.
:: 색다른 사건
재즈 밴드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밴드 멤버 중에 한 사람이 범인인데... 어떻게 잡을 것인가?
논리적 추리와 기발한 트릭이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야기 앞 부분에 그런 분위기를 풍겼지만 말이다.
함정을 파서 범인(딱히 동기는 없고 그냥 미쳤다.)을 잡는 식이었다. 살인 욕구를 충동질하는 음악으로.
:: 유리 눈알을 추적하다
강등 당한 경찰 아버지를 위해 실적 올릴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아들 이야기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서 청소년 소설 분위기다.
물물교환으로 우연히 얻게 된 유리 눈알을 단서로 범인을 잡으려 한다. 형사 아들답게 재치와 끈기가 있다. 미행도 훌륭히 해낸다.
마침내 그 유리 눈알의 주인/시체를 발견하고, 살인범과 마주한 소년. 이때 아버지가 도착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짧은 영화 한 편 같다.
:: 죽음을 부르는 무대
공연 중에 갑자기 비틀거리다가 죽은 무희. 우연히 공연을 보던 경찰이 쓰러진 여자를 받아내고 조사에 착수한다. 온 몸에 금박 페인트를 칠하고 지우지 않은 것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제목만 보고 뭔가 무대 장치 트릭일 거라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 하나를 위한 세 건
날마다 같은 신문대에서 같은 신문을 사서 읽던 사람이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수사 중에 진범을 잡았으나 위의 압력으로 풀어줘야 했던 형사. 이제 경찰을 그만두고 오직 이 범인을 추적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법으로 안 되는, 정의 실현을 위해 집요하게 매달리는 형사 캐릭터다.
마무리는 운, 혹은 운명적으로 처리되었다. 아쉽지만, 작가 스타일이다. 어쩔 수 없다.
:: 죽음의 장미
부잣집 영애가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자기 스스로 목숨을 걸고 미끼가 된다. 범인은 공습 경보 등화관제에 살인 충동이 일어난다. 미리 알아둔 경보 시각이 다가오고, 자신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분명 범인인 듯한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식으로 전개된다. 범인이라고는 절대 생각 안 했던 사람이다. 역시 운으로 마무리된다. 어찌어찌 해서 범인은 잡히고, 그자는 최후를 맞이한다.
:: 뉴욕 블루스
코넬 울리치의 솜씨가 최고조에 이른 단편소설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남자가 경찰이 와서 자신을 체포해 가길 두려움 속에서 기다린다. 끝에 반전이 있다. 놀라움과 슬픔이, 깨달음과 죽음이 동시에. "예전에 사랑했다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로군. 난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359p
작가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나온다. 호텔에 처박혀 공포에 찌들린 인간. '그 사람은 결코 방에서 나오는 법이 없고, 식사도 방으로 배달시켜 먹고, 항상 문을 잠가놓고 지낸대.'(321p) 작가가 살던 당시 1960년대 뉴욕 도시 풍경을 그려냈다.
"인생이란, 한발 한발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이다. 정신이 산 채로 매장되는 것이며, 밝은 곳으로 기어 나오려고 애를 쓸 때마다 그 위에 새롭게 묘지의 흙을 덮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죽음에서는, 결코 완전히 죽을 수 없다." 357~358p
밤 그리고 두려움 1 코넬 울리치 지음 프랜시스 네빈스 편집 하현길 옮김 시공사 펴냄 2005년 12월 발행 절판 전자책 없음
코넬 울리치는 운명에 관심이 많았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운, 운명, 죽음, 행운이 나온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도 대개 그렇다.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하더니, 몇몇 소설은 읽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 담배 Cigarette
죽음의 담배 러시안 룰렛. 독살하기 위헤 담배에 독극물을 주사해 놓았고, 이것을 피우는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아주 간단히 끝나버릴 일이었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하자 담배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이동에 이동을 거듭한다. 마침내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작가가 평생 집착한 주제 운, 운명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소설이다. 숙명에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 동시상영 Double Feature
전형적인, 혹은 진부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 한 편을 본 듯했다.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봤다.
현상 수배범을 영화관에서 발견한 경찰 이야기다. 이후 전개는 충실하게 적절한 기승전결로 나아가고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쓸데없는 문장이 없이 이야기를 서술해서, 놀랐다.
:: 횡재 The Heavy Sugar
훔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설탕 통에 숨긴다. 도둑은 보석을 되찾으려고 하고, 우연히 보석을 손에 쥔 자는 갖고 도망치려고 하고, 경찰은 도둑과 보석을 잡으려고 한다.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총격전이 일어난다. 고생 끝에 주인공은 재치를 발휘해 보석을 경찰한테 전달한다.
초반부 카페테리아 묘사가 인상적이다. 워낙 글솜씨가 좋다.
:: 용기의 대가 Blue is for Bravery
'동시상영'처럼 경찰 이야기다. 경찰 드라마 한 편 본 느낌이다.
강직한 경찰관이 뇌물을 거부하고 살인 혐의자를 신고한다. 그러자 그 살인범한테 아내가 납치를 당한다. 총격전 끝에 아내를 구한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데드라인을 설정해서 긴박하게 전개된다. 아내를 납치한 범인이 1시간을 주며 신고를 취소하라고 한다. 아내를 구하라!
:: 목숨을 걸어라 You Bet Your Life
독특한 이야기다. 내기인데, 특이하다. 평범한 사람이 돈 욕심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내기다.
일종의 실험. 고액 화폐를 정확히 둘로 자른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한테 한 쪽씩 줍게 한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을 가진 사람을 알려준다. 나머지 반쪽 화폐를 얻기 위해 과연 살인을 할 것인가.
결말은 밤처럼 어둡고 블랙커피처럼 씁쓸하다. 시작할 때 이미 끝났다. 운명이니까.
:: 요시와라에서의 죽음 Death in the Yoshiwara
미국 해군 수병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 갑자기 한 백인 금발 여자가 경찰에 쫓기며 들어온다. 살인 누명을 썼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일단 도망을 도와준다. 여자의 사연을 들어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고 남자 본인도 호기심에 사건 현장으로 가서 조사를 한다. 이후 탐정 놀이 겸 액션 영화 찍는 듯한 장면이 전개된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비극을 품은, 해피엔딩?
:: 엔디코트의 딸 Endicott's Girl
경찰 서장이 살인 현장에서 딸의 흔적을 발견하고 어떻게든 없애거나 감추려고 한다. 코넬 울리치의 특징인데, 인물을 모호한 상황에서 불안에 떨게 한다. 과연 딸은 살인자인가? 작가가 왜 이렇게 이런 두려움을 그리는 데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본격 형사물을 기대하고 읽었다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 윌리엄 브라운 형사 Detective William Brown
완전히 대비되는 두 경찰 이야기다. 간신히 졸업하고 가까스로 경찰에 합격한 조 그릴리. 머리 좋고 실력 좋고 운도 좋아 승승장구하는 윌리엄 브라운.
선한 조는 악한 윌리엄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브라운 형사는 뇌물을 뜯어내고 경찰 승진을 위해 살인해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든다.
클래식 음악 플루트 연주자가 쓴 클래식 입문서다. 당연히 저자의 전공인 플루트 연주곡을 수록했다.
클래식은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배경 지식을 알면 이해해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 소개 글이 필요하다. 작곡가의 생애, 곡의 구성, 연주자의 해석.
일단, 글이 짧아서 놀랐다. 읽다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루하기 시작하려고 할 때쯤에는 글이 끝나 있었다.
자신의 개인 경험을 이야기하지만 질질 길게 끌지 않는다. 한두 문단으로 끝난다. 그리고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클래식 용어 설명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시디 사면 라벨에 인쇄되어 있는 글보다 짧았다.
곡의 해설과 분석과 클래식 용어 설명으로 가득한, 교과서가 아니라 한뼘짜리 클래식 음악 소개서다.
종합선물세트 과자처럼 추천곡 106곡이 들어 있다. 각 곡은 QR코드로 유튜브에 연결된다. 틈 날때마다 소개 글 읽고 해당 곡을 빠르고 손쉽게 감상할 수 있다. 삶의 여백에 날마다 한 곡씩 들어 보면 되겠다.
균형잡힌 영양제처럼 골고루 선곡했다. 작곡자마다 최대 3곡씩. 모차르느는 예외. 유명하고 중요한 곡은 빠짐없이 넣었다. 글쓴이는 파헬벨의 캐논 D장조를 "온 세상 모두가 아는 곡"이라서 선정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유튜브 연주 영상 보고 넣었다고 한다.
유명한 클래식 곡이지만 모르는 사람을 주변에서 종종 본다. 그 음악 소리를 알고 있으나 그 곡을 누가 작곡헸고 제목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자동차 후진음으로 유명한 그 곡, 세탁 종료음으로 유명한 그 곡, 영화에서 들었던 그 곡, 광고에서 들렸던 그 곡, 휴대폰 벨소리 그 곡, 일본애니메이션에 나왔던 그 곡. 이렇게 말이다. 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소개 안 되어 있다.
한때 유행했던 말, 아니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고 있는 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칭찬을 해서 춤추게 해야 할 대상은 고래가 아니다. 사람이다. 고래한테는 배고플 때 먹을 걸 주면 좋아라 하겠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지 않는다. 돈만으로 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너무나 철학적이라서 어렵다고? 이 책의 답은 단순하다. '인정'이다.
사람은 남한테서 인정받고 싶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다. 아주 미칠 만큼 인정을 받고 싶다. 나의 실력을, 나의 외모를, 내 생일을, 내 심정을, 내 사정을, 내 불만을, 내 기쁨을 제발 좀 알아달라고 난리도 아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것은 '나'다. '너'가 아니다. 나 좀 알아달라고요!
머리 모양을 바꾸고 새 옷을 입고 출근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안 알아주며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직장에서 완전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특히, 외모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그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아무나 붙잡고 욕을 하고 싶으리라.
저자는 영어 단어 '어크날리지먼트(acknowledgement)'를 쓴다. 인정하다, 승인하다, 용인하다, 자인하다, 고백하다 등의 뜻이다. 이 낱말의 느낌은 뭔가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하다. 지은이 스즈키 요시유키는 "칭찬하는 것도 어크날라지먼트에 포함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와 언어, 그 모든 것이 어크날리지먼트입니다."(21쪽)라고 했다. 상대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 중에 대표적인 예가 칭찬이다. 그 외 인사, 경청, 배려, 선물, 상장 등이 있다.
무작정 칭찬해서는 소용이 없다. 오히려 반발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진심으로 자기 존재를 인정해 주는 말 한 마디가 '진짜 칭찬'이다. 말에 상대를 받아들였다는 진심이 담겨야 '참된 칭찬'인 것이다.
왜 블로거들이 댓글에 목말라 하는가. 왜 트위터리안들이 멘션에 열광하는가. 자신을 알아줘서 그렇다. 그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날 내내 기분이 좋다. 구독자 수, 방문자 수, 조회 수, 팔로어 수, 리트윗 수가 늘어나도 그렇다.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 언어를 통해 누군가 나를 알아주었음에 감사한다.
자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그 잘남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갈 의욕, 다시 말해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왓슨 없는 홈즈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사랑해주는 이가 한 명만 있어도 이 세상은 천국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 못 산다.
우리는 칭찬에 인색하다. 돈 쓰는 것보다 더하다.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그렇다. 누구나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 자기가 먼저다. 그 다음에 남이다. 게다가 칭찬은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비용을 먼저 제때 제대로 지불해야 효과가 있다.
줘야 받는다. 받은 후에 주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받은 후에 준다. 상대가 들어올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자기 욕심에 두 주먹 가득 먹을 것을 쥐고 안 놓는다. 한 손을 펴서 상대에게 '관심'을 줘야 한다. 상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으니, 칭찬하는 일이 거의 없다.
진짜 칭찬을 하려면 상대의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또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진심에서 우러나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억지로 한 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상대는 눈치를 채고 불쾌하게 여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칭찬의 '기술'을 가르쳐 준다.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 기술보다는 '마음'이다. 마음을 담지 않고 여기서 소개하는 기술을 썼다가는 오히려 상대의 화만 돋우게 되리라.
이 책의 지은이는 사람의 유형에 맞게 칭찬하는 전략을 가르쳐 준다. 네 가지 인간형이 있다.
1. 컨트롤러형 누군가한테 지배당하기보다는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을 곧바로 칭찬하면 의심한다. 따라서 그가 속한 팀을 칭찬하라. 또한 목표를 성취했을 때 바로 자연스럽게 칭찬한다. 표현은 단호하게 한다.
2. 프로모터형 기분파다. 한 번 분위기 타면 한없이 날아오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칭찬을 받아들인다. 날마다 크건 작건 과장되건 사실이건 뭐든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아서 일을 척척 해낸다. 주의할 것은 절대 부정적인 말을 해 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기분이 나빠지면 끝을 모르고 의기소침해진다.
3. 서포터형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성실파다. 내성적인 사람인데, 잘 눈에는 안 띠지만 조직에서 없어는 안 될 만큼 대부분의 일을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한다. 그러니 평소 하는 일에 대해 칭찬을 꾸준히 해줘야 한다.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칭찬을 안 해주면, 조직을 배신하거나 떠난다.
4. 애널라이저형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유도 없이 무작정 칭찬하면 반감을 산다. 구체적으로 명확히 어디가 어떻게 저기가 그러니 칭찬을 받는 것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대개 이런 사람은 몸보다 머리를 많이 쓴다. 행동하기 전에 이런저런 분석을 마쳐야 한다. 따라서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한다. 이 사람의 능력을 믿고 기다렸다가 가져온 결과를 보고 칭찬하면 된다.
리더는 같이 일하는 조직원들에게 뭘 줘야 하는가?
그들의 '가치'를 알아줘야 한다. 그것이 칭찬으로 나타난다. 주기만 하면 리더는 손해인가? 아니다. 칭찬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리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짐을.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자신감을 얻게 되리라. 그리하여 당신은 사랑 받고 존경 받고 행복을 느끼게 되리라.
새삼스럽게 공자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따르는 이가 있다. 진실로 그러하다.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 Mystery Writer's Handbook 미국추리작가협회 지음 로렌스 트리트 엮음 정찬형, 오연희 옮김 모비딕 펴냄 2013년 2월 발행 전자책 없음
추리소설 쓰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읽었다가, 역시나 소설 쓰는 것은 쉽지 않구나를 깨달았다. 장르소설이라고 해서 쓰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오만이다.
어렵든 쉽든 어쨌거나 이 책으로 추리소설 쓰는 방법을 알아보자.
첫째, 추리소설을 쓰는 것과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그 방향이 다르다. 아무리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도 정작 쓰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독자는 추리소설 작가가 뿌려 놓은 여러 단서를 보면서 용의자들 중에 범인이 누구인지 생각한다. 작가는 반대다. 범인을 정한 후 최대한 범인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면서 여러 실마리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드러낸다.
둘째, 범죄소설을 쓰기 전에 배경지식을 얼마나 갖추었나 반성해 보라. "추리소설 작가에는 '현대범죄수사' 같은 범죄 수사 교과서나 '법의학, 병리학, 독극물학' 같은 법의학 교과서, 그리고 '범죄학 개론' 같은 경찰학 교과서들의 최신판이 필요하다." 9~10p
이미 읽은 소설에서 대충 알고 있으면 충분할까. 사후경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나라 경찰조직은? 그들이 쓰는 은어는? 우리나라 법의관은 어떻게 일하고 있나? 교도소는? 형법은? 범죄 재판 과정은? 미행은 어떻게 하는가?
그런 거 몰라도 재미있게 쓸 수 있을 거라고? 그딴 거 몰라도 추리소설을 쓸 수 있다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데뷰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독극물 지식과 영국 특유의 법률 지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알아야 쓴다. 상상만 해서는 쓸 수 없다. 재료 없이 요리가 안 되듯.
물론 이런 지식을 무시하거나 아예 멋대로 꾸며 쓴 추리소설도 있긴 있다. 밀른이 쓴 '빨강집의 수수께끼'는 형사 사건 수사의 기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편한 대로 썼다. 그리고 그렇게 써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이 이야기에서 신원 조회 문제는 수수께끼의 핵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이냐. 범죄 수사 관련 지식을 정확하고 명확히 알고 있되, 지나치게 사실대로 쓸 필요는 없다. 소설은 사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보이게 쓰는 것이니까.
픽션과 논픽션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병리학자가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에서 법의학 관련 묘사가 실제와 너무 달라서 황당했다고 해도, 소설에서는 용납이 된다.
셋째, 소설 쓰는 방법 자체는 정말이지 간단하다. 문제는, 간단해 보여도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 제4장 플롯에서 프레드릭 브라운이 살짝 웃음이 나게 가볍게 쓴 글을 읽고나면, 소설 쓰기가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알게 된다.
브라운이 말하는 플롯 쓰기 방법은 '덧붙임'이다.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대 쉽지 않다. "덧붙임은 인물, 주제, 배경, 단어 등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덧붙임을 통해 거기서부터 플롯이 만들어진다." 57p
소설 쓰기는 상상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문장을 하나씩 만드는 일이다. 생각을 해야 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가만히 방에서 놀고먹으면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소설 쓰기는 철저한 정신노동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작가의 경험담에 경악했다. 노동도 놀이처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수 있겠는가.
넷째, 퇴고가 프로 작가와 아마추어 작가를 나눈다. 정확히는 작품에 대한 애정 유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퇴고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철저하다. 글쓰기의 진짜는 초고가 아니라 퇴고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매뉴얼일 뿐 현실은 아니다. 지키면 좋을 거라는 것이 꼭 지키라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다.
퇴고의 관점에서 엄밀히 볼 때,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즈 시리즈는 아마추어 작품이다. 그는 명백한 오류 지적에도 원고를 수정하지 않았다. 한 번에 내달려 쓰고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일이 홈즈를 싫어했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다. 돈 때문에 쓴 것도.
반면 끝도 없이 퇴고를 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문단 혹은 한 문장 안에 계속 뭔가를 집어 넣으려는 짓이 프로라고? 미친 짓이다. 정상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퇴고란 삭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공들여 힘들여 쓴 글을 내 몸 같은 글을 잘라내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편집 디자인의 측면이다. 대개 작가들은 죽어도 자기가 쓴 글을 삭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자기 팔다리를 잘라낼 것이다. 힘들여 썼는데 그걸 지우려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퇴고는 글이 빠르고 정확하게 읽히게 수정하는 것이다. 초고를 되는 대로 쓴 후에 퇴고에서는 쓸데없이 반복되는 구절이나 표현, 군더더기의 부사와 형용사를 잘라낸다. 그러면 문장과 문단과 글 전체가 가볍고 빠르게 읽히게 된다.
퇴고는 독자 입장을 생각해야 할 수 있다. 독자가 잘 읽도록 배려하는 작업이다. 작가 본인 입장만 생각하면 절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고 고치기 싫으며 고치기를 거부한다. 왜 애써 추가 노동을 해야 하는가.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이룸 펴냄 종이책 2009년 10월 발행 절판 전자책 없음 단숨 2014년 개정판 옮긴이 같고절판
제목부터 다크 초콜릿 맛이 느껴지는 누아르 소설이다. 시적인 표현에 섬세한 감정 묘사의 로맨스 장면은 유치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으나 내게는 멋지고 최고다. 여기에 데드라인 정해 놓아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코넬 울리치 스타일이다.
남자 예언자가 나오는데, 주인공은 아니다. 이 예언자의 예언을 이용해서 경제적 부를 이루다가 남자. 어느날 그렇게 부를 이룬 이의 죽음을 예언해 버린다. 이제 남은 시간이 며칠 없는데...
앞날을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자는 예전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 이 소설과 달리, 예언자가 여자다. 소녀시대 서현이 주인공이었다. '징크스의 연인'이다. 나름 재미있게 봤었다.
이 예언자는 진짜인가? 사기꾼 아니야? 정말 예언대로 죽게 될까? 예정된 죽음을 막기 경찰이 수사와 감시와 미행과 보호를 한다. 과연 뭘까? 그렇게 궁금해서 지루함에도 500쪽이 넘는 책을 다 읽었다. 대개들 완독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의 필력이야 워낙 뛰어나지만 길고 세세히 쓸 것까지는 없지 않았나 싶다. 역시나 단편을 늘려 쓴 것이었다.
미스테리아 10호 "코넬 울리치의 단편 '죽음에 대해 말해봐(Speak to Me of Death)'는 장편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의 원작 격인 작품이다. 백만장자는 특정 날에 특정한 방식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다. 오컬트 미스터리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는 설정,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이 인간의 계략인지 혹은 인간의 힘으로 막지 못할 운명의 힘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두려움이 독자를 사로잡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알겠다. 운명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딱히 공감은 안 가던데... 밤 별빛이 무서워요? 미쳤으니까 저렇게 행동한다고 할밖에.
뭔가 짜잔 하는 반전이나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랬던 것 같아 하고 궁금증을 대충 해결해주는 식이라니.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해서 불안을 조성한 것이겠지. 그렇게 이해는 되지만 실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마지막 두 남녀의 사랑 정도였다. 이 작가는 로맨틱한 장면 만들어내는 데는 선수다.
실직한 사내가 살해당한다. 가장인 그의 아내와 자식과 친척들은 그를 무시한다. 딱히 특별한 거라고는 없는 사건. 하지만 살해 당시에 그가 싣고 있었던 누런 구두는 이 사내의 일상과 너무 달랐다. 이 단서로 범인을 추적해 가는데...
실직한 가장의 죽음. '갈레 씨, 홀로 죽다'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비슷해도 너무 비슷했다. 그래도 초반이 흥미롭기 때문에 어쨌거나 끝까지 다 읽긴 했다. 끝이 워낙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범인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고 그냥저냥 잡힌다. 살짝 웃음 하나 남기고 끝났다. 불쌍한 라푸앵트.
"루이 투레가 누런 구두를 사 신었다는 것은 매그레가 보기에 하나의 단서였다. 우선, 그것은 해방감의 증거였다. 유행하는 구두를 신고 있는 동안은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인 듯이 생각되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즉, 도로 검은 구두로 갈아 신을 때까지는 아내와 처제, 동서들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78~79쪽
그 흔한 구두 하나로 소시민의 고독을 이토록 절묘하게 잡아내다니. 귀신 같은 솜씨다. 왜 작가들이, 소설가들이 조르주 심농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니콜라이 고골을 우습게 제친다.
옛날 외국 소설에서 우리나라 현재를 느끼다니. 씁쓸하다. 실직한 가장 남편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아무래도 일반적인 추리소설 독자라면 실망할 작품이다. 정교한 트릭, 환상적인 추리, 놀라운 반전으로 밝혀지는 의외의 범인.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겠지. 도서관 종이책이 거의 새 책에 가까웠다. 인기가 없다.
하지만 매그레 심농 팬이라면 다르다. 반장님이 자기 방식대로 나쁜 년놈들 혼내주는 것과 범인 잡는 와중에도 웃음을 선사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 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민음사 펴냄 2022년 2월 발행
제목만 보면, 아동청소년용 과학소설 같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무적 최강 병기 우주선을 타고 외계인 악의 무리를 슝슝 뿅뿅 다 헤치울 것 같지 않은가. 책표지에 로켓이 그려져 있었다면, 그렇게들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표지는 소설의 핵심 존재를 묘사했다. 검은 구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공포의 대상이겠으나 아직 안 읽은 이한테는 아닐 것이다. 뭐지? 심심하네. 고작 구름?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지구에서 제조된 강철 유기체이자 수백 년 동안의 기술 발전으로 이루어 낸 결과물인 콘도르호가 바로 이곳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져 버렸다." 25~26쪽.
무적호는 실종된 콘도르호를 되찾기 위해 파견되었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 왜 인류 최강의 우주선을 어떻게 그토록 간단하고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는가. 인류의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다.
그 존재는 생물이 아니었다. 머리가 다섯 개 달린 고지능 외계 생명체가 아니었다. 무생물이었다. "무생물 진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요. 기계 장치의 진화 말입니다." 175쪽.
초미세 곤충형 기계. Y자 모양. 이것들이 모여 그 공포의 검은 구름 혹은 폭풍우를 형성한다. 일종의 '구름형 뇌'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솔라리스'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소설 '우주 순앙함 무적호'에서도 인간 중심으로 우주를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발 디디는 곳마다 인간의 이해력에 상충하는 모든 것들을 함선의 무력으로 파괴해야 하는가?" 251쪽
"인간과 비슷하거나 이해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아닌 일, 즉 인간과 관계없는 사안에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빈 공간은 차지해도 무방하지만, 수백만 년 동안 이미 생존의 균형을 이루어 실재하는 대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253쪽
"모든 것이,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316쪽
초중반까지는 딱히 이야기라 할 것이 없었다. 그저 무시무시하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무적의 존재에 대한 묘사와 대결이었다. 그러다가 후반부는 드라마다. 이야기의 초점이 구름에서 사람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일관성에서 벗어난, 엉뚱한 결말이다 싶었다. 조금 지나서 생각해 보니, 무생물 무적 존재와 대비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이다.
무생물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진화한 존재한테는 로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자기 목숨을 걸고서 생존자를 확인하고 죽은 이를 위해 무덤을 만든다.
로한이 마침내 귀환하여 우주선을 보고 "너무도 장엄하였으므로 단연 무적호라고 할 만했다." 하고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과학 기술이 아니라 인류애에 있음을 확인한다.
'솔라리스'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대표작이다.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많이 읽혀졌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마지막을 읽어내는 이는 드물다.
무척 씁쓸한 결말이었다. 달콤한 환상만 골라 먹으려는 이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겠지. 구원을 바라지 않는, 불가지론자/무신론자의 바람은 무엇인가?
외계와의 접촉.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와 만난다. 살아있는 바다? 외계 존재도 인간을 이해하려는 듯 뭔가를 보내는데...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솔라리스의 바다와 소통할 수 있겠어?" 52p
"우리는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아. 다른 세계는 필요치 않은 거지.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인 거야." 160p
그가 지구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솔라리스 바다의 움직임을 해일이라고 명기했음을 알 수 있다. 솔라리스 앞에서 지구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무능력하고 우스꽝스러운 발상이다. 245p
솔라리스의 바다를 핵무기로 파괴해야 한다는 청원이 제기된 것은, 솔라리스 연구가 시작된 이래,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복수보다 훨씬 가혹한 방식이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식의 대응책이었기 때문이다. 271p
이런 식의 대응은 후속작 '우주 순양함 무적호'에도 나온다. 솔리리스는 1961년,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1964년 발표했다. 대결로 치달아서, 완전히 없애려고 시도한다. 헛수고가 되지만.
"채찍으로 바다를 내려쳐서 복수를 시도하는 건 어때?" 340p '우주 순양함 무적호'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배와 선원들을 침몰시킨 벌로 바다를 채찍질하는 짓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적호 184p 애초에 의미도 없고 되지도 않는다.
이야기 중후반에서 켈빈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없애고자 했던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 기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
"물론이지, 나는 당신을 사랑해. 만약 당신이 본래의 그녀였다면, 사랑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왜요?" "내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거든." 323p
켈빈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속죄하는 마음에서 이 존재를 사랑하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사랑, 그 자체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런 켈빈한테 스나우트가 냉정하게 말한다.
"자네는 지금 이 비인간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것은 아름다운 노력임에 분명하지만, 결국은 헛된 일일세. 달리 생각하면, 그게 과연 아름다운 행위인지도 잘 모르겠군. 어리석은 행위를 가리켜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335p
그리고 켈빈의 뼈를 때린다.
"그녀는 자네 뇌의 일부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고. 그녀가 아름다운 건, 자네의 추억이 아름답기 때문이네. 그러한 근거를 제공한 건, 순전히 자네야. 순환적인 환상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말게!" 342p
정작, 심리학자는 켈빈이고 스나우트는 인공두뇌학자다.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 켈빈의 심리 분석은 본인 스스로가 아니라 스나우트가 해준다. 스나우트는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존재의 자살로 끝난다. 기억을 모방한 존재인지라, 마음과 행동의 최종 결과도 같아져 버렸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난 듯한데, 주인공/작가의 바람을 표현한 사색/후기가 덧붙었다.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신은 바로 그런 신이야. 자신이 겪는 고통을 구원이라 떠벌리지 않고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인 신 말일세." 435p
켈빈은 솔라리스 바다와 직접 접촉한 후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내 안에는 아직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자취다. 내가 여전히 기대하는 완결과 환멸과 고통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447p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시공사 펴냄 1996년 발행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이 책을 읽은 사람도 있으리라. 나는 그 사람이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장담한다. 이 소설책이 그리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에 그런다. 그는 분명 상당히 복잡한 인간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리라. 나도 그 부류니까.
예전에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정리할 수 없었다. 장황스러운 설명과 철학적 사유는 어지러웠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여전히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소설은 우주선 출발로 시작한다. 주인공 켈빈이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로 향한다. 솔라리스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켈빈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다. 스테이션에 있는 동료 학자들은 환각에 시달리고 있다. 캘빈도 그 환각과 직접 만난다. 환각이 솔라리스의 바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해결책을 찾는다.
솔라리스 행성은 인간의 인식 범위에 벗어난 존재다. 이 행성의 유일한 생명체로 여겨지는 것은 바다인데, 이 또한 인간의 과학적 사고가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존재다. 작가는 이 솔라리스에 대한 인류의 접근 방식이 인간/지구 중심적인 인식 체계를 고집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걸 비웃는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솔라리스에 대한 도전은 그 문명에 대한 이해보다 더 중요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면적인 문제, 즉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솔라리스에 대한 묘사는 백지다. 그 백지에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느껴서 그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그저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도록 여러 사실과 문헌과 대화를 꾸며냈다. 솔라리스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따라서 불가지론의 사유에 이를 수도, 한낱 우스개로 여길 수도 있다.
작가는 지구 중심적 사고에 대한 회의를 켈벤의 동료 학자인 스노우를 통해 말한다. SF소설과 우주에 대한 생각의 옹졸함을 꼬집는다. "우리는 우주를 정복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지구를 우주 규모로 확대하고 싶어할 뿐이야. (······) 우리가 원하는 건 인간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냐. 지구 이외의 다른 세계 같은 건 필요 없어. 다만 우리를 비출 거울이 필요한 것뿐이야. 다른 세계 같은 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우리에겐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그 지구만으로는 뭔가 불충분한 것 같이 느끼지. 그래서 우주에서 이상향을 찾아 보려고 하는 거야. 우리는 지구 문명보다 더 완전하고 우수한 문명을 가진 세계를 찾아 우주로 나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미개했던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야."
이 책이 난해한 것은 아니다. 인식론을 다룬 철학책은 아니니까. 이야기를 쓴 소설책이기에. 이야기는 켈빈의 과거 정신적 고통과 사랑이 그 환각적 존재와 연결되면서 감상적으로 흐른다. 솔라리스의 바다가 켈빈의 과거를 읽어내어서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가짜 존재를 보낸다. 옛날에 켈빈이 매정하게 애인을 떠난다는데, 애인이 그만 자살해 버렸다. 그 옛 애인이 다시 생생하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 허상이라는 걸 알지만, 진짜 같아서 믿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독자를 그런 소재의 재미로 이끌기보다는 생각하는 흥미로 인도한다. 솔라리스에 대한 이해 불가능은 인간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소설 마지막 부분에 켈빈의 독백, "지구는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대한 도시에 파묻혀 버린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를 읽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
사람이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가.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남을 추측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솔라리스가 당신에게 묻는다. 책장을 덮어도, 그 물음은 한동안 당신 머릿속을 맴도리라.
렘의 솔라리스는 세 가지 시각에서 읽을 수 있다
1. 과거 소중한 존재가 유령으로 나타나는 공포
자살했던 옛 애인이 다시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점만 강조해서 읽으면, 단순한 공포소설이다. 렘이 아무리 과학 지식을 줄줄이 늘어놓는다고 해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진짜처럼 출몰하는 과거의 유령들. 그리고 이를 물리치려거나 거기에 매혹되는 인물들.
이 소설을 영화로 바꾼 감독들은 이 점을 주목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소설을 죄의식과 구원의 주제로 바꾸었다. 원작 소설가가 영화 제작자한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은 물론이다. 인간의 자기 중심적 사고를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으니. 원작자가 북쪽으로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는데, 각색자가 남쪽으로 돌려놓은 꼴이다.
2. 진정한 소통의 부재
이야기의 재미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과연 우리는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 인간이 자기 중심적 사고를 우주로 팽창한다는 소설가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의문이다. 솔라리스와 인간이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메시지를 상대에게 맞추면 정작 나 자신을 전할 수 없고, 나 자신의 메시지만을 전하면 상대는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남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남과 같은 무엇을 전하는 게 전부다. 근본적으로 남과 다른 무엇이란 애초부터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분적으로 이해한다. 자기와 공통되는 부분만 받아들이기 마련이기에.
3. 외계 존재의 인식 방법
렘은 이 소설로 기존 과학소설의 전제를 무너뜨렸다. 기존 이야기는 외계 존재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아무 근거도 없이 확신하거나, 외계 존재를 무시무시한 침입자로 묘사했다. 왜 이런 식으로만 외계인을 볼까.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렇다고, 렘은 말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에 대해 여전히 자신을 투사해서 볼 뿐이다. 자신을 투사할 수 없으면 괴물이다. 없애야 한다.
솔라리스는 다른 과학소설이 무시했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지구 이외의 세계 존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대실 해밋. 192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계의 대부. 유명하다.
해밋의 하드보일드는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고 정보다는 이익이 더 중요하다. 그가 작품을 쓸 당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워낙 그랬다. 그렇게 살아야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금주법, 갱들, 경제공황.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여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 추리소설이 바로 하드보일드다. 하드보일드에 나오는 탐정은 총질과 주먹질을 아주 잘한다.
미국 1920년대는 펄프픽션의 전성 시대였다. 싼값의 대중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대중소설의 수요과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드보일드'라는 전혀 새로운 추리소설은 바로 이 시기에 출판한 '블랙 마스크'라는 잡지에서 탄생했다. 물론 대쉴 해미트는 이 잡지에 '붉은 수확'을 연재 발표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대실 해밋은 붉은 수확, 딘 가의 저주, 몰타의 매를 차례로 발표하여 '샘 스페이드'라는 사립 탐정의 독특한 개성을 창조했다. "새뮤얼 스페이드의 턱은 길고 뼈가 불거진 데다 끝 부분이 튀어나와서 V자 모양을 이룬다. 그 위에 자리 잡은 입 또한 그보다 유연하기는 해도 역시 V자 모양이다. 휘어진 두 개의 콧구멍도 작은 V자가 된다. 황회색 두 눈은 한일자 모양이다. V자는 매부리코 위쪽 두 개의 주름에서 뻗어 나간 숱 많은 눈썹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연한 갈색 머리카락은 양쪽 관자놀이와 이마 위 한 지점을 뒤집힌 V 모양으로 연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는 유쾌한 금발의 악마 같은 인상이었다." 9p
인물 외모 묘사를 하면서 V라는 단어 표현을 무려 5번 사용했다. 같은 단어를 반복해 쓰면서도 인상적이고 효과적인 문장을 쓰기란 쉽지 않다. 작법책에는 같은 단어나 같은 표현의 중복을 피하라고 한다.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 초보자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맞다. 반면, 능숙자는 원칙을 알면서도 이를 위반하여 더 뛰어난 효과를 거둔다.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거죠." 86p
7장 초반에 나오는 '플릿크래프트' 이야기는 묘한 느낌을 준다. 스페이드가 애써 이 이야기를 다짜고짜 오쇼네시한테 하는 이유는 뭘까? 전체 이야기에 대한 어떤 암시인가?
옮긴이 고정아는 이를 이야기 끝의 복선으로 보고 있으며 실존적 통찰을 통해 기존 사회 관습을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재구성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소설 집필 당시 별거 중이었던 아내 조스한테 하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덧붙임 3'을 보라.
플릿크래프트 이야기는 작가의 경험담과 상상력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사설탐정으로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갑자기 실종된 남편. 대실 해밋의 이야기꾼 실력은 단지 그런 이야기에 있지 않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버린다.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되려면 플릿크래프트는 빔 사건 이후 다른 삶을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그는 다시 똑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부조리 결말이 나 버린 새드엔딩인데, 아주 기묘한 느낌을 전달한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빔처럼 이 이야기는 큰 이야기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넣은 걸 보면 뭔가 의미가 있을 법한데 아무리 살펴 봐도 없다. 그냥 독립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이나 이 이야기를 듣는 여자 캐릭터나 이 이야기에서 딱히 어떤 의미나 교훈을 찾지 못하거나 찾지 않는다.
주인공 스페이드는 사랑이나 정보다는 돈과 현실적인 이득에 따라 행동한다. 스페이드를 간단히 말하면 터프 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터프 가이와 다른 점은 현실적으로 냉혹하게 생각하여 판단할 때 여자와의 사랑이 자신에게 불리하면 가차없이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다 읽으면 썩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을 테니까. 그나마 거짓말 안 하고 누군가를 믿으려 하는 사람은 탐정의 비서인 에피 페린밖에 없다. 스페이드가 에피를 천사라고 부르는 건 그래서다. 반면 브리지드 오쇼네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해대고 남을 이용하려고 든다.
작가는 실제로 탐정 생활을 했었다. 그러기에 1920년대 미국 사립 탐정의 모습을 현실에 매우 가깝게 묘사할 수 있었으리라.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새뮤얼 스페이드이고, 작가의 이름은 새뮤얼 대실 해밋이다.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은 작가를 상당히 많이 닮았다.
# 덧붙임 1 전자책 전자책 초판에는 오탈자에 띄어쓰기 잘못에 구두점 오류까지 있어서 읽기 불편했으나, 2017년 1월 31일 2차 수정판이 나와서 많이 교정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있다.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2023년 9월 15일 4차 수정판에도 여전히 띄어쓰기 잘못이 첫 문단에 보인다. 위쪽두 -> 위쪽 두
# 덧붙임 2 영화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1941년 영화다. 워낙 유명하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어서 DVD와 블루레이로 구해 볼 수 있다. 지루했다. 그리 추천하진 않는다.
실의 두 끝을 맞매어서 양쪽 손가락에 얽어 두 사람이 주고받으면서 여러 가지 꼴을 만드는 놀이. 이상은 표준국어사전의 뜻매김이다. 나는 이 놀이를 할 줄 안다. 요즘 아이들은 할 줄 아나? 이 책에 보면 꽤 오래 전부터 이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에스키모 사람들도 이 놀이를 즐겼다.
실뜨기 놀이를 해 본 사람은 알리라,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 끝장이 나 버린다는 것을. 더 이상 이어 받을 수 없을 때가 온다. 종말이 온다. 그렇지 않으려면 같은 동작으로 같은 모양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으. 지겨워! 그렇게 하느니, 그냥 빨리 끝장을 내는 게 낫다. 이 소설은 이 끝장을 '아이스 나인'으로 처리했다. 모든 것 얼려 버리는 물질, 아이스 나인. 그렇게 가는 거다.
아이스 나인은 작가의 냉소를 뜻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 모두 얼어 버려라! 뭐 그런. 커트 보네거트가 끝까지 냉소를 유지한 작품은 드문 편인데, 이 소설은 확실하게 냉소로 끝냈다.
그의 냉소는 무의미의 의미를 생산한다. 무슨 의미? 지도자라는 녀석이 인류를 그토록 많은 피와 희생의 전쟁을 치르게 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그런 멍청한 지도자를 뽑아서 또 다시 살육의 전쟁을 준비하려 한다. 북한 김정일의 핵도 미국 부시의 전쟁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계속 하고 있다. 계속, 하고 또 하고.
'갈라파고스'에서 만다락스가 농담하듯, '고양이 요람'에서는 보코논서가 궁시렁거린다. 보코논서는 보코논교의 성서다. 기독교 성경을 비꼬는 어투가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이 작가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 곳이 많다고.
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 (1966년) 커트 보니것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이 소설의 제목은 세 개다. 제5도살장(Slaughterhouse-5), 소년 십자군(The Children's Crusade), 죽음과 억지로 춘 춤(A Duty-Dance with Death). 독자가 마음대로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다. 미국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전세계 젊은 독자들도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
[제5도살장]은 그의 대표작으로, 작가 스스로도 A학점을 매긴 작품이다. 그의 장기인 블랙 유머와 SF기법을 현란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지은이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네거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소총수로 참전했다.
그 전쟁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의 작센 지방으로 끌려가 드레스덴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이 포로수용소에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이 가해졌는데, 그는 용하게 살아났다. 옛날에 도살장으로 쓰였던 포로수용소 건물의 지하 방공호가 깊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도살장이었던 곳에서 폭격을 피해 살아나다니, 정말 블랙 유머 같지 않은가.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본 작가는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그 체험을 글로 쓴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공포를 유머로 이겨내며 소설로 쓴다. 그 글이 바로 이 작품 [제5도살장]이다.
이 작품은 과거, 현재, 미래가 질서 정연하게(?) 뒤죽박죽으로 전개된다. 또 SF 기법과 포르노 소설 기법으로 독자를 웃기는데, 정말 못 말릴 정도다.
인간의 허위의식과 겉멋만 든 진지함을 꼬집는 독특한 유머가 가히 천재적이다. 이 작가의 유머는 우리의 상상을 넘는다. 트랄화마도르 인(외계인)을 등장시켜 인간을 풍자한다. 예수도.
이 작품 어디를 봐도 심각하고 진지한 표현은 없다. 가벼운 표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그러나 그런 가벼운 유머 뒤에 숨겨진 작가의 고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의 바탕에는 작가의 어두운 체험(전쟁 체험)과 인류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 '뭐 그런 거지'. 나는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웃었다. 작가도 그 문장을 쓰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웃음과 그의 웃음에는 차이가 있다. 작가의 웃음은 전쟁의 공포와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이기려는 안타까운 노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웃음은 울음의 다른 표현이다. 울음 같은 웃음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길, "울 수 없으니까 웃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