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책세상
2005.12.20.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을 위한 안내서
혹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이 알아야 할 10가지
혹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을 위한 도움말

1. 1권 초반부 외계인의 지구 폭발까지 읽어야 이 책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읽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각자 느낌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라. 애써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을 의무는 없다.

2. 이 책이 웃긴다는 소문을 듣고 읽으려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개그 콘서트 웃음을 바라지 말 것. 영국식 유머다. 우리랑 다르다. 바로 웃기는 게 아니라 좀 있다가 웃긴다.

3. 어느 정도의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철학·예술 상식이 있으면 좋다. 그런 상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으나 크게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4. 여유가 없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점심을 먹은 후 나른한 오후에 딱히 할 일 없는, 그런 한가함이 있어야 한다.

5. 이 책은 코믹 SF다. 하드코어 SF를 바라지 마라.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왜냐고 따질 사람은 다른 책을 읽어라.

6.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를 아는가. 알면 제대로 찾아 왔다. 같은 종족이다. 블랙 유머를 즐겨라.

7. 이 책에서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가 사라져도 당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무해하다. 다시, 이 책은 대체로 무해하다.

8.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는 5권에 나온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난다.

9. 이 소설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평은 무시하라. 이 소설을 끝까지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10. 마음껏 웃어라. 그러라고 쓴 책이다.

지구가 사라져도 쫄지 마라

코믹 에스에프 소설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무척 일상적인 얘기를 우주적 차원으로 놓고서 수다를 떤다.

제목부터가 여행 안내서를 따서 만들었다. 자동차 얻어 타는 걸 우주선 얻어 타는 걸로 살짝 바꾸고, 도로 만든다고 자기 집 부수는 국가를 우주 도로 놓겠다고 지구 부수는 외계인으로 슬쩍 함께 놓았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는 게 한심하게 일상적인 일이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맥주 먹고 샌드위치 만들고. 이런 게 과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1권 끝부분에서 점심 먹는 걸 우주 철학으로 끌어 올리는 문장을 읽는다면 정말 재미있다는 걸 감 잡을 수 있다.

영국식 유머는 독특한 찌름이 있다. 무척 평범한 걸 끌어다가 묘한 독특함을 끌어낸다. 게다가, 이 소설가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식을 끌어다가 우스개로 재배열시킨다. 방대한 양의 익살이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은 걸 할 줄 알지만 고작 시시한 일만 해서 우울증에 걸린 로봇 얘기는 유머의 심리학이다.

완성작은 무려 5권이나 되지만, 그 시작은 무척 미미했다. 처음에는 간략한 라디오 드라마였단다. 시시껄렁하게 대충 만든 거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어서 연작이 되고 마침내 소설로 나온다. 영화는 작가의 사후에 나왔다.

이 소설을 쓴 더글러스 애담스는 부조리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건강하려고 운동하다가 심장마비로 가셨다. 그렇게 가셨다. 부조리 소설가의 부조리한 죽음이여!

소설은 지루한 편이다. 단, 처음에 읽을 때만. 아마 통독하기 만만치 않으리라. 반면, 영화는 경쾌하다. 원작을 너무 줄여 놓아서 심오함이 없지만.

성질 급한 분은 이 소설도 영화도 피하시는 게 좋다. 시간이 넉넉하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바로 그때 이 소설과 영화를 거들떠 보길 바란다. 우주적 농담으로 해탈하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지구가 사라져도 쫄지 마라. 괜찮다. 대체로 무해하니. 안심하라."

서글픈 농담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도서관이었다. SF를 좋아하는 한 분이 적극 추천했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재미없었다. 그렇게 재미있다는 책이 이렇게 재미없고 따분하다니. 그나마 재미있었던 것은 1권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점심과 관련된 농담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서 잊혀졌다. 몇 년만이었을까.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일 것이다. 적어도 12년만일 것이다.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시립도서관에 5권까지 나란히 꼽혀 있었다! 완결된 모양이네. 책을 펴서 보니, 작가는 불합리하게 저 위로 가셨다. 심장마비로 죽은 대학 동기가 있어서 우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해진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가셨군요. 뭐 그런. 일단 1권을 대여해서 과연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 보려 했다. 역시나 잘 안 읽혔다. 나랑 안 맞나 보군. 그래도 모르지 싶어 갖고 다녔다.

조카 시험 보는 데 따라갔다가 한참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게 뭐람. 다시 이 책을 펴 들어 읽었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교정 한 구석 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시작부터가 나랑 비슷한 상황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 한가함에 둥둥 떠있는 모습.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며칠 후 5권까지 다 읽었다. 애써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을 필요는 없다 싶었다. 건너 뛰고 싶으면 그냥 건너 뛰었다. 그런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재미와 흥분을 거치고서 끝 부분에 이르자 평범하지만 그래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맞다 싶게 끝났다.

글쓴이가 상당히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철학, 문학, 경제학, 역사,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지식을 고작 이런 농담에나 쓸 정도밖에 안 되다니. 서글펐다. 글을 썼던 시대 상황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뭐 지금이라고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볼 순 없지만.

영국식 농담에 대한 이해가 아직 덜 된 탓인지, 더글러스 애덤스 스타일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이 소설은 여전히 내게 낯설고 썩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또 한가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아서 덴트처럼 훌쩍 지구를 떠나 은하계를 여행하고 싶다.

겁먹지 말고 일단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는 거다. 히치하이커의 기본 자세는 그거다. 책 읽으려는 몽상가가 그러하듯.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땐 그렇게.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아커를 위한 안내서 : 영국식 농담에 SF와 철학의 양념을 뿌린 소설

사는 게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더라.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긋지긋한 것이 아니라 지루했던 것이었겠지. 하지만 내겐 지긋지긋한 것이나 지루한 것이나 똑같다. 지루해지면 지긋지긋해진다. 지긋지긋해지면서 지루해진다. 봐라, 뭐가 다른가. 똑같지. 지금 왜 지루함과 지긋지긋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모르겠다.

번역의 문제인지, 내 독서 방법의 문제인지, 묘사가 지루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통독을 거부했다. 대학생 때 이 책을 처음 봤다. 그때 철거 공사 장면까지만 읽고 책 끝에 있는 점심 얘기를 읽었다. 점심 얘기는 마음에 들었다. 마침 배가 고플 때 읽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늘 2006년 11월 27일 통독했다. 신비스러운 우주의 기운을 받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을까. 신비로운 기운은 무슨, 개뿔. 내가 철이 든 것일까. 남자가 철드는 거 봤냐. 그저 나이가 든 것이다.

가장 심각한 일이 가장 우스꽝스럽다. 사람 죽는 게 그렇다. 이 책의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2001년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심장 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지구가 멸망하는 모습이 이 책에서 가장 우습다.

이 책이 내게 준 교훈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나친 심각함은 두통을, 지나친 진지함은 냉소를, 지나친 완벽은 절망을 낳는다. 철학적 농담이 주는 여유, 그게 더글러스 애덤스가 주는 선물이다.

이런 철학적 농담 SF가 아니라 진짜 철학 SF를 읽고 싶다면,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읽어 볼 것. 영화로 보지 말 것. 꼭 책으로 읽을 것!

‘솔라리스’의 인식 철학에 따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이렇다.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로 나가 외계인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로봇 컴퓨터랑 대화를 해도 결국 우리 인류의 얘기이다.

영국을 떠났어도 아서 덴트는 여전히 영국 얘기를 하고 있다. 홍차에 뭐에. 영국식 농담에 SF와 철학의 양념을 뿌렸다.이 지긋지긋한 지구를 떠나는 방법을, 작가는 1권 맨 앞에 적어 놓았다. 물론 농담이다. 진짜 전화하려고?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 우주 종말과 시간 여행

왜 사람들은 2권을 읽지 않았을까? 도서관에서 3권을 빌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2, 3. 1권은 많은 사람들이 대출해서 읽었는지 책 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예전에도 1권이 없어서 대출을 못 했으니 1권의 인기는 대단한 것 같다.

2권은 앞부분만 조금 읽었는지 앞표지가 접힌 흔적이 있다. 하지만 3권은 아무도 읽지 않은 듯 표지를 접은 흔적이 없다. 새 것처럼 보인다. 4, 5권은 아마도 3권과 비슷한 운명으로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으리라. 내가 집어 읽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책보다 이 책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아마도 1권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궁금해서 다들 읽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영국식 농담과 이해하기 어려운 박학다식 잡담(예술과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에 대해 회의적이었던지 2권은 조금 거들떠보고 3권은 아예 안 봤다.

2권은 우주의 종말과 시간 여행을 다루었다. 주인공 아서 덴트는 지구의 과거로 간다. 석기 시대인 듯. 1권과 마찬가지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마도 3권에서 답이 나올 듯하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전개되고 농담은 흐른다.

서양인은 왜 그리 성경 이야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종말, 구세주, 사과 이야기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이 책에도 나온다.

로봇 마빈의 대사가 걸작이다. 1권이었나 2권이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런 말을 한다. 삶을 외면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어도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정말이지 정곡을 찌르는 우울한 대사 아닌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 인물이 바로 이 로봇이다.

정확히 똑같은 스타일은 아니지만 같은 종류로 묶을 수 있는 작가가 있다. 미국 사람 커트 보네거트다. 이 사람이 더 냉소적이다. 더 종말론적이다. 더 웃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소설 '갈라파고스'의 만다락스와 '제5도살장'의 새가 겹쳐 보였다.

이제 읽는 속도가 붙었으니 3권은 후다닥 읽어 치울 듯하다.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무심한 사람의 무의미한 수다

도서관에 갔다. 1, 2권을 반납했다. 4, 5권을 빌렸다. 예상대로 4, 5권은 깨끗했다. 사서의 손과 나의 손을 제외하고 이 책을 만졌던 손은 없었을 것만 같은 그런 모습으로 4, 5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4권은 두 권이나 있지? 인기가 좋아서 두 권씩 갖춰 놓은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내 짐작이 틀린 거잖아.

크리켓 얘기가 나온다. 영국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스포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가끔 이 경기 장면을 본 적은 있다. 야구랑 비슷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영국의 국기(國技)란다. 한 팀에 11명. 이 경기의 트로피가 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떻게? 그냥. 주인공 아서 덴트는 우주의 파괴를 막는다. 진지하게 의도적으로 막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냥 어쩌다가 그냥 그렇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에 대한 설명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정말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거로 보이네. 천만에 말씀이다.

다음 편에서 얘기해 줄라고 그러는지 이제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역시나 아서 덴트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다. 나도 관심이 없다.

핵무기와 냉전으로 요약할 수 있었던 지난 1980년대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의 그런 부조리에 지긋지긋해진 작가의 끝없는 불만과 불평이 이런 수다로 나온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고 핵무기의 위험과 전쟁의 도발과 인류의 멸망에서 자유로운 시대는 아니다.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 잠을 주는 수다

4권은 주인공 아서 덴트의 연애 이야기다. 피터팬처럼 남자와 여자가 날아다닌다. 왜냐고 묻지 마라. 여기 4권까지 읽은 당신이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돌고래가 인간에게 남기고 간 어항 이야기도 나온다.

3권에서 예고했던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는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직접 읽어 보라. 다들 그 메시지에 별 관심이 없으리라 믿는다. 여기 4권까지 읽었다면 말이다. 그나마 4권에서 읽을 만한 농담은 그게 다다. 1권의 점심 농담처럼.

참고로, 다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에 대한 설명은 4권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5권에서 나오나?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정말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거로 보이네. 천만에 말씀이다.

주변 사람들 중에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권”을 읽어 보라고 권하라. 수면제보다 이 책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게다가 부작용도 없다. 대체로 무해하다. 1980년대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핵무기와 빨갱이. 정말 옛날 책이다.

5권 대체로 무해함 :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42

지구를 떠나 외계에 정착해도 주인공 아서 덴트는 여전히 지구인의 그저 그런 일상을 산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나와 상관없다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 그 일들은 무관심했던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우연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어처구니없이 많이 발생하는 세상이다.

목숨을 걸만큼 대단하고 소중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소중한 것을 버리고 하찮은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무모하고도 어리석고도 이상한 일을 했던가.

그 많은 전쟁과 그 많은 죽음이 과연 그 하찮은 것을 위해 희생되었어야 하는가. 우리의 슬픔은 거기서 시작되었기에, 우리는 그저 울거나 웃을 수밖에 없다.

오직 종말이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에 잘못 읽었다. 이 소설의 끝은 종말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예전에 대충 빨리 읽고 내 맘대로 나 좋을 대로 결말을 짓고 그렇게 기억했던 것이었다.

이 소설은 그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 오직 종말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끝장나고 그걸로 끝이다.

산만하고 엉뚱하고 복잡해 보여도, 이 잡다한 것들을 모두 연결시켜 이야기라는 인과논리의 그물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구사하는 농담의 차원이 상당히 지적이고 무척 철학적이다.

작가의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인생관이 다소 불편할 수 있고 이를 표현하는 블랙유머도 불편할 수 있겠다.

참고로, 5권 합본 끝에는 부록으로 등장인물 설명이 있다.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을 읽으려면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 바쁘다는 말과 시간없다는 말을 거의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을 읽어내긴 불가능할 것이다.

2015.5.13

Posted by lovegood
,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은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일본 SF 대작이다. 워낙 추천이 많았다.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 보았다. 은하영웅전설은 은하제국의 야심가 라인하르트와 그에 맞서는 자유행성동맹의 명장 얀 웬리의 승부를 다루고 있다.

서기 2081년 인류는 지구를 탈출하여 알테바단계의 제2행성 테모리아로 정치적 통일의 무대를 옮겨 은하제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그 해를 우주력 1년이라고 명명한다. 은하제국은 루돌프 폰 골덴바움의 독재로 세워진 국가다.

은하제국에에서는 루돌프의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하자, 그 반대파 중 몇 명이 도망쳐서 민주공화제를 신조로 삼는 자유행성동맹을 결성한다. 또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 사이에 상업 자유 무역 국가인 페잔 자치령이 세워진다. 은하제국과 행성동맹은 전면전에 돌입한다. 이 전쟁에 젊은 두 영웅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금발과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공자로서 전쟁의 천재인 은하제국의 로엔그람 폰 라인하르트. 역사학을 배우기 위해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자기 뜻과는 반대로 군인이 되었고 전쟁을 싫어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맹군 대장 얀 웬리. 이들은 바로 그 두 영웅이다.

또 이 두 국가의 경제력을 휘어잡아 우주를 지배하려는 페잔의 영주인 아드리언 루빈스키. 그 루빈스키를 조종하는 지구교 총대주교는 인류의 중심을 다시 지구로 돌리려 한다. 이들이 벌이는 음모와 야심과 전쟁과 사랑과 우정이 우주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얀과 라인하르트의 펼치는 우주 전함 싸움의 전략과 전술이 이 소설의 재미다. 얀은 전쟁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또 전쟁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목숨은 결코 전쟁에 바치지 않는 정치꾼들에게도 냉소를 보낸다. 라인하르트는 위대한 독재자가 되는 야망을 갖고 출세를 향해 돌진한다. 목숨은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승리에 집착한다.

이 SF를 청소년용 SF라고 단순하게 볼 수가 없는 것은 대비되고 있는 정치형태와 등장 인물의 성격이 진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 정치에 대한 작가의 역사적 통찰력이다. 작품의 서술 흐름이 꼭 역사가의 구술처럼 진행된다. 이것은 작가가 얀의 입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정치에 대한 냉소와 지난 인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 것이 작가와 얀이 똑같다.

민주 공화정인 민주 체재인 자유행성동맹와 전체 군정의 독재 체재인 은하제국의 정치적 변화도 눈 여겨 볼 가치가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입맛이 씁쓸했다. 자유 행성 동맹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사를 보는 것 같았다.

읽을 가치는 충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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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탄생
마이클 래비거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년

편지나 보고서 같은 일상 실용문이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다. 책으로 나올 때까지는 자신만 이 사실을 알고 지내고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픽션 창조는 평범한 일상은 아니다.

픽션(소설, 시나리오, 드라마) 쓰는 방법을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다른 그 어떤 책보다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연습 과정을 잘 마련해서 웬만한 창작 교실보다 낫다.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창작방법을 마련해 놓았다. 특히, 클로새트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방법이다. 극작가 이강백이 다른 한 분과 공동으로 펴낸 창작론 책을 펴 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클로새트(CLOSAT)는 픽션을 구성하는 요소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다.

C character 인물
L location 장소
O object 사물
S situation 상황
A act 행동
T theme 주제

전체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 요소를 평소에 조금씩 하나씩 만들어 둔다. 그러다가 이것들을 결합하고 확대하고 배열해서 창작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를, 그것도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픽션을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근거는 모든 삶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가 진지하게 진실을 탐구하면 통찰의 순간에 이른다는 것이다. 좋은 예술 작품은 그 진실의 통감이다.

목차와 겉모습은 자잘한 창작 기술을 가르쳐 주는 듯 보이나, 들어가서 살펴보면 글쓴이 마이클 래비거의 철학이 스며 있다. "이 책은 개별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인격체라는 신념에서 쓰였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 알고 싶으면 바로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신념에서 쓰였다. 좋건 싫건, 이런 작품만이 당신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다." 250쪽

요리와 달리, 이야기는 방법을 안다고 바로 써낼 순 없다. 이 책을 안 읽었어도 이미 많은 작가들이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그들이 대체로 이 책에서 설명한 방법을 쓰고 있을 뿐이다.

대학생 때,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픽션을 써댔다. 원고지 5장짜리 짤막한 콩트에서 원고지 1200매짜리 장편소설로까지 나아갔다. 아무도 내게 글을 쓰라고 하지 않았다. 너에게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 준 이도 없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쓰는 거라고 알려주는 책도 읽지 않았다. 나는 내면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대담하게 그대로 글로 노출시켰다. 쓰는 일에 몰두하자 방법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이야기를 처음 지어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다지 독창적이지는 않았다.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조합해 내가 사는 동네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옆집 5학년한테 이야기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아이는 내 말을 100% 사실로 받아들였다. 재미는 있었으나 거짓말을 했다는 미안함에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고백했다. 그때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실망감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 빠져들어 행복해 했던 표정과 겹쳐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 졸업반 시절, 소설론 강의 시간에 내가 지어낸 짧막한 이야기 두 편을 학생들 앞에서 소리내어 읽었다. 박수를 받아 기뻤으나 그들의 놀란 표정이 당혹스러웠다. 마치 "외계인이 나타났다!"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픽션을 쓸 수 있는 사람, 혹은 쓰려는 사람은 흔한 편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썼다고, 혹은 쓰려고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너처럼 평범한 사람은 소설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나도 모르게 믿어 버렸고 이내 창작은 멈췄다.

요즘 주변 사람들한테 듣는 얘기는 내가 정말 특이한 사람이며 나 자신을 소설로 쓰라고 할 정도다. 나 자신이건 주변 사람이건 이미 있는 이야기의 캐릭터를 등장인물로 활용하건 이야기가 굴러간다면 가져다 쓰면 된다.

이야기는 작가가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반응 혹은 해석이다. '작가의 탄생'이란 그 누구든 우리와 우리 세상에 대해 진솔하고도 공감할 수 있게 말하는 순간이리라. 자기가 절실하게 느낀 삶의 진실을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작가로 태어나라.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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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히는 글쓰기
Hypnotic Writing (2007년)
조 비테일
웅진윙스 2007년 절판
나비의활주로 2023년 신

이 책의 목표는 하나다. 어떻게 하면 내 글을 읽히게 할까? 비테일은 먼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히게 하겠다는 욕심부터 버리라고 한다. 글쓴이 자신은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아직도 안 읽었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단다. 왜? 자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읽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명심할 사실은 모든 사람이 내가 쓴 글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 관심사 외에는 애써 글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당신이 열심히 밤새워 사업 계획서를 썼다고 해도 투자자는 자기 관심을 끌지 못하는 부분은 그냥 넘기고 안 보고 안 읽는다. 투자자한테 읽히려면 투자자의 관심이 뭔지부터 파악한 후에 거기에 맞춰 사업 계획서를 써야 읽힌다. 읽히는 글을 쓰고자 한다면, "내 자아에서 빠져나와 독자의 자아로 스며들어야 한다."

지은이는 마치 최면을 걸듯 쓰라고 충고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듯 글을 써라. 반복하면 의미가 강해진다. 구체적 사실과 혜택을 써라. 이미지를 그려라. 가상 독자 한 명을 마련해서 대화하듯 써라.

자기 편한 대로 쓰면 글은 읽히지 않는다. 독자가 편하게 읽히게 써라.

상대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을 써야지, 나만 관심이 있는 것을 써서는 읽힐 가능성이 줄어든다. 단어 하나라도 상대가 평소에 자주 쓰는 거나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써야 읽힌다. 그러니 지나치게 생소한 표현이나 단어는 피해야 한다.

특히, 반복은 심리적으로 중독성이 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사랑해"를 적어도 세 번 이상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해야 효과적이다. 이는 광고에서도 심리 마법으로 불린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상표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문학 작품을 쓰는 사람보다는 사업계획서를 쓰는 사람한테 좋은 글쓰기 책이다. 마케팅, 세일즈, 영업, 사업하는 분인데 글을 쓸 일이 많은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그동안 썼던 제안서를 완전히 뜯어 고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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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 잡으려 사형수 탈옥 시켜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 중에 유명하고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제목이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목 - 열린책들 최애리 번역본
사나이의 목 - 동서문화사 민희식 번역본
남자의 머리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결국, 이 모든 제목은 '사람의 목숨'을 뜻합니다. "뭣이 중헌디?" 영화 곡성에 나온다고 하는데, 심농의 추리소설 '남자의 머리, 타인의 목, 사나이의 목'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의 목숨이 중합니까, 스캔들이 중합니까?" - 최애리 열린책들 번역본

매그레 형사는 자기가 체포해 놓고도 이 자가 무죄임을 알아서 자기 자리를 걸고서 판사, 장관, 교소도의 허락을 받아 사형 집행이 임박한 남자를 일부러 풀어 줍니다.

젊은 판사는 마지못해 이런 매그레 형사의 계획에 찬성했지만, 유독 한 신문에서 사법당국과 합의 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자를 탈옥시켰다는 보도가 터지자 짜증을 냅니다. 게다가 매그레 형사가 수사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자, 판사는 더더욱 짜증을 부립니다.

독자도 이 소설을 읽어 나아가면서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값비싼 고급 카페 구석에서 싼 음식만 주문하며 자리를 오래 지키던 자가, 사건과 전혀 관련성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 대뜸 말이죠, 매그레 형사한테 사건 관련 힌트랍시고 주절거리면서도 절대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댈 수 없고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고 조롱하는 겁니다. 약이 오르죠.

실제로 도대체 뭔가 뭔지 알 수 없기는 독자도 매그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끝에서야 알 수 있게 되죠.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마지막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떠오릅니다.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머리는 좋지만 가난한 청년,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거의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것까지. 그럼에도 심농은 장황하게 중얼대지 않습니다. 라데크는 사형 직전에 "망했군!" 한마디를 할 뿐이고 매그레는 난로에 석탄을 넣어 화구가 부셔져라 불을 쑤셔댈 뿐입니다. 

정의는 실현되었으나 떫은 씁쓸함이 남습니다.

타인의 목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책 제목은 그 이름도 이상한 '사나이의 목'이다. 제목이 워낙 특이해서 몇 번인가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이상하게도 1장조차 읽어내지 못했다. 시작부터 사형수가 나와서 꺼림직해서 더 읽기 싫었다. 읽기를 단념한 후, 그 이후 사건 전개를 내 멋대로 이상하게 상상했다. 사나이의 목이 잘렸으리라, 끔찍하게!

열린책들은 제목 번역을 '타인의 목'으로 정했다. 여전히 눈길을 끈다. 제목만큼이나 시작부터 아주 별난 소설이다.

주인공 매그레가 자신이 잡은 범인을 일부러 탈옥시킨다. 매그레가 직접 잡은 범인이지만 그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양심의 목소리에 따른 것이다. 증거는 확실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괜히 억울한 사람을 죽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니, 그는 자신의 목숨은 아니지만 거의 목숨 같은 자기 자리를 서슴없이 건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자를 일부러 풀어준다. 그리고 추적한다. 추적하던 부하가 탈옥수한테서 머리 부상을 크게 당하고 그만 추적을 놓치고 만다.

매그레는 다시 탈옥수를 추적해 가던 중 부자들의 호화로운 식당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만난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자가 자꾸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매그레를 다그친다.

의학도 출신의 젊은이는 대놓고 매그레와 사건의 진상을 놓고 대결한다. 혼자서 열심히 사건 해결을 위한 여러 말을 쏟아대지만, 매그레는 꿈쩍도 안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로쟈'를 보는 듯했다. 가난해서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어 가면 아주 미친다. 분명히 저 자식이 범인인데 도저히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독자는 주인공인 매그레 입장이 되는데, 자꾸만 옆에 와서 약올리는 말만 해대니.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아주 미친다, 미쳐. 게다가 돈자랑까지 해댄다. "반장님, 경찰 양로원에 몇천 프랑쯤 기부하려면 누구한테 말해야 합니까?"

그러다 후반부에서 전세가 역전된다. 매그레가 자신을 조롱하던 라데크를 몰아대며 질문을 퍼부으며 이것저것을 명령한다. 관련이 없어 보였던 조각들이 맞춰지며 경악스러운 진실이 밝혀진다.

책 표지의 커피잔을 보니, 라데크가 카페 한 구석에서 제일 싼 커피만 사서 홀작거리면서 부유한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값비싼 칵테일을 마시며 떠드는 모습을 응시하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단지 돈이 없을 뿐인데 나는 이렇게까지 몰락해야 하는가.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저들은 저렇게 살 권리를 얻는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가난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자극해 주었으니까요." 라데크가 신문 파는 노파를 심술궂게 돈으로 놀린다. "2백 프랑... 3백... 자! 여기 있어... 5백 줄까? ...하지만 이걸 벌려면 할멈은 뭔가 노래를 불러야 해. 춤도 추고 말이야! ...우선 노래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장면을 읽는 듯했다.

괜히 유명한 작품이 아니었다. 역시 명작이다. 억울하게 죽을 수 있었던 사형수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교차되어 정의를 실현하나 씁쓸함은 남는다.

2014.05.02

이미 읽은 책이지만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터라 다시 추리해야 했다. 역시나 또 어긋났다. 이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작가를 이길 수 없다. 이야기 설정 자체가 읽는 사람 약올리는 구조다. 

조르주 심농의 '타인의 목'은 추리 게임으로써는 불공평한 소설이다.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용의자들이 나열되고 어떻게 해도 서로 들어맞지 않는 단서 조각들을 펼쳐진다. 심지어 범인이 스스로 형사 앞에서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전혀 모르고 있다며 닥달을 하는 판국이다.

범죄 주인공이 머리가 비상한, 의학도다. 그의 재능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해서 병을 찾아내듯 상대의 약점을 치밀한 관찰로 알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며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없다. 그는 그저 돈만 많은 인간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이 역겨워 자신의 능력을 범죄에 활용한다. 완전범죄를 완성하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돈은 갖고 있어봐야 쓸 데도 없다.

하여, 살인자 라데크는 형사 매그레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해서 무명의 환자로서 죽기 전에 천재적 범죄자로서 사형을 당하길 원한다. "꼭 사형이 되도록 힘 좀 써주십시오, 반장님!"

이 소설은 읽고나면 불편한 심기가 남는다. 가난에 대한 분노, 좌절된 꿈, 역겨운 인간들이 잘살고 잘먹고 잘 지내는 세상.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는 사건이 해결되면 그걸로 끝이지만, 조르주 심농의 쥘 매그레는 범인의 감정을 끌어안고 인생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간다.

2014.10.09


오랜만에 전자책으로 통독했다. 단문 간결체이고 분량이 중편과 장편 사이라서 금방 읽었다. 더구나 마성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전자책이었으니.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다.

'타인의 목'은 조르주 심농이 쓴 매그레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영국 추리소설과는 너무나 달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그리 인기가 없는 편이다. 시리즈 전체 번역 출간을 기대했던 출판사조차 두손 들고 포기했다.

범행 자체는 간단하다. 진상을 모르는 초중반에는 신기하고 흥미롭긴 하겠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에서 선보이는 신묘한 트릭 같은 것은 없다.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는 우와 놀랍기보다는 아 그런 거였구나 정도의 느낌이다. 이래서 아무래도 선뜻 매그레를 읽지 않으려는 것 같다. 추리소설의 재미라고 느끼는 것이 빠졌다고 여기리라.

일단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어쨌거나 끝까지 읽게 된다. 그 과정이 썩 유쾌하지 못하다. 끝도 그렇다.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고 아예 미행을 붙인 형사랑 술도 같이 마시질 않나 아예 매그레랑 같이 이동하기도 한다. 반장한테는 계속 진상을 알 수 없지롱 하면서 약 올리는 녀석이라니. 나중에 역전이 될 때까지는 이 놀림을 감당해야 한다.

소설가는 제목부터 정하고 그 제목에 맞는 소설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타인의 목'은 그런 경우였다. "아무 아이디어도 없는 상태에서 발행인에게 제목부터 통보했단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경우 '왜 그들은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가 여기에 해당된다. 책 제목을 책 내용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목만 이미 정해도 책의 절반 이상을 해결되었다고 느낄 정도라니.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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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Dune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황금가지 펴냄
2021년 1월 발행

영화보다 책이 더 좋은 이유는? 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한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세한 얘기를 하지 못한다. 반면 책은 지면은 크게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다. 때론 영화의 간결함이 더 좋을 때도 있지만.

낯선 용어는 여전히 책 뒤에 있는 용어 해설을 봐야 했다. 하지만 점점 듄의 세계가 익숙해지면서 그다지 낯선 곳이 아닌 곳이 되어갔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하코넨의 공격으로 아트레이드 가문이 망하고 레토 공작이 죽고 아들 폴과 제시카가 사막으로 도망친다. 서로 원수 집안이었던 두 가문이 사실은 결국 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 피의 연결이 폴이다. 폴은 이 두 집안의 전쟁을 끝낼 운명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방대한 분량의 글인데도, 이야기 전개는 단순하다. 영웅 신화의 전형이다. SF를 뒤집어 쓴, 진부한 신화? 그 신화라는 것은 인위다. 사람을 의도적으로 교배해서 특정 우성인자를 지닌 자를 태어나게 하려는 베네 게세리트 집단을 보면 그렇다. 또, 그 신화라는 것은 끝없는 주입으로 세뇌시킨 말일 뿐이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신화라고 볼 순 없다. 말 그대로 계획이다.

영화에선 잘 알 수 없었던 각 인물의 감정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주인공 폴. 폴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치를 떨며 싫어한다. 자신을 괴물이라고까지 부른다. 1부가 메시아 전설 실현을 다루고 있는데, 정작 그 전설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조작된 것이고 그 계획의 희생자이자 행운아인 자신이 이렇게 끌려다니는 것에 염증을 낸다.

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의문. 메시아 전설의 대표적인 주인공 예수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저주했을까. 영화 매트릭스도 이 전설을 따른다. 크게 보면 영웅 신화의 일종인데, 아마도 뭔가 초인적인 지도자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리라. 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이런 영웅 신화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불안은 과학으로 제거될 수 없다. 그래서 종교는 여전히 필요하다.

억압이 있는 곳에는 종교가 번성한다는 말을 확장시키면, 전쟁의 가능성은 종교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소위 성전, 지하드는 종교 때문이라지만 결국 억압이 근본 원인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면 종교는 사라진다. 억압과 불행이 이어지는 현실에서 종교는 번성하고, 번성한 종교는 전쟁을 부른다.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린치 감독의 영화는 메시아 신화의 완성에 집중했다. 결말도 그래서 비가 오는 장면으로 끝냈다. 하지만 책에는 비 내리는 장면은 없다. 게임 듄은 전쟁에 치중했다. 세 가문이 듄이라는 모래 행성에서 다툰다. 각종 전투 장비에 대해 책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게임은 전쟁 무기를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책은 영화와 게임과 달리, 정치적 음모라는 드라마에 치중했다. 폴이 공주와 정략 결혼으로 황제가 되는 결말을 보여준다. 린치 감독 영화만 봤다면 공주가 왜 혼자서 주절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부록으로 듄의 생태계, 듄의 종교, 베네 게세리트의 의도와 목적, 귀족들의 연감, 아라키스 지도 등이 있다. 이야기에 덧붙인 설명이다. 안 읽어도 되지만, 읽으면 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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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의 밤
조르주 심농 | 열린책들

팜므파탈 + 푸아로식 파이널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이 소설 '교차로의 밤'은 좋아할 것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식 파이널과 대실 해미트의 팜므파탈이 등장하니까. 느와르 분위기의 범죄 영화 느낌이다.

소설은 살인 용의자로 유력한 '검은색 외알박이 안경을 낀 남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대개 오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으면 무너지기 마련인데, 이 남자 안데르센은 침착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본인의 본래 품성인 듯 보인다.

사건은 황당하다. 안데르센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보험업자의 차고에 있는 새 차 대신에 안데르센의 헌 차가 주차되어 있다. 화가 난 보험업자는 신고를 하고, 이에 안데르센 차고에 가 보니, 그 새 차가 있고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총을 맞아 죽고서 운전석에 엎드린 채 있었다.

시골 한적한 교차로에는 세 집이 있다. 보험업자의 집, 안데르센의 집, 그리고 자동차 정비소. 당연히 이 세 집 중에 한 집에 사는 사람이 살인범이다. 그래서 모두 감시한다.

안데르센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안데르센은 동생을 가두고 외출한다. 뭐지? 이 여자가 팜므파탈로 나온다.

차고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남편을 보러온 여자는 교차로에서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후 이야기는 빠르게 읽히게 될 것이다. 뭐가 뭔지 정신이 없겠지만,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용의자들 모두 모아 두고서 매그레 반장이 끝에서 정리해서 설명해 준다.

푸아로식 파이널은 매그레 시리즈에서 지난 5편 '누런 개'에 이어 두 번째다. 용의자와 사건 관련 인물을 모두 소집한 후 매그레가 하나씩 하나씩 그동안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범인을 밝힌다.

우물 장면이 웃겼다. 마지막 장면은 남자의 순정이다.

액션 범죄 영화를 보는 듯한 소설

매그레 시리즈는 감기 걸렸을 때 읽게 되는 소설이 되어 버렸다. 아픈 와중에도 유일하게 읽히는 책은 심농 소설이다.

이 소설 후반부는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우물 안에서 난장판이다. 여자 한 명에 남자 세 명이 붙어서 아주 가관이다. 그래도 결말은 역시 심농의 심성이 잘 배어 있었다. 매그레 시리즈는 읽는 이유는 이 마지막 부분의 연민 때문이다. 소설 같은 얘기지. 순정을 다 바쳐 사랑하는 사내라니.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가장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초반부 교차로의 세 건물 갈등 상황과 중후반부 총격 장면은 영화 시나리오라고 불러도 될 만큼 사건 전개가 빠르다. 시대와 장소로 현재에 맞춰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어도 상당히 좋은 결과를 보일 듯하다.

이 작품을 읽고서야 왜 심농을 별종 같은 천재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된다. 심농은 대중소설의 기술력과 순수문학의 문장력을 동시에 갖추었다. 특히, 교차로의 밤은 미국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보는 듯했다.

매그레 반장의 수사 방식 자체가 괴짜다. 증거 수집해서 수수께끼 조각을 맞추는 것에는 별 관심도 없고 오로지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 사람이 말하는 태도와 외모와 옷차림에 집중해서 뭔가 이상하고 어색한 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빨리 쓰느라 그랬는지 생뚱맞은 문장이 튀어나와 있기도 하던데...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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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씨, 홀로 죽다
조르주 심농 | 열린책들

문학적 여운

정교하게 만든 미스터리다. 중간에 총알이 발사되고 누가 쏘았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에 정신이 없는 중에 반전으로 사건을 풀어버린다. 힌트는 앞에 즐비하게 있지만 구체적인 사연을 알기 전까지는 알아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대개들 끝까지 헤매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추리소설들이 다 그렇듯, 트릭의 비밀을 알고나면 허탈할 것이다. 홈즈 시리즈의 '토르 교 사건'과 같은 수법이다. 심농이 이를 참고해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이 다섯 번째 읽는 거라서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재미는 덜했지만, 독자를 당황하게 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는 솜씨는 잘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 불쌍한 갈레 씨. 지지리도 복이 없었던 인생.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추리소설에서 범죄 수수께끼 게임보다는 범죄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분위기, 인상, 그리고 인생살이에 치중한다. 실제로 인상적으로 남는 것은 범죄 수수께끼 풀이가 아니라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 했던 갈레 씨의 사연이다. 소설 끝 부분은 손수건 한 장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지경이다.

"다만, 그의 오른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여전히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래 평화였어! 그가 기다렸던 것은 바로 그거였다고!" 252쪽

단순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문학적 여운을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매그레 시리즈 총 19권에서 나는 이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를 최고로 꼽는다. 가장 쓴 맛이 나는 소설이다.

추리물을 넘어 문학으로

시리즈 1권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실망한 탓에 기대를 안 하면서 읽었다. 후반부로 가도 뭐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다 바로 다음 문장을 만나고 조르주 심농을 문학 천재로 불러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다만, 그의 오른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여전히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234, 235, 243, 252쪽

이 문장을 무려 네 번 반복한다. 첫번째는 사건을 목격한 생틸레르의 진술로 나오고, 두번째는 사건을 풀어내는 수사반장 매그레의 회상으로 또 나오며, 세번째는 사건을 풀어서 말하는 매그레의 말에서 나오고, 네번째는 사건 종결 후 매그레가 회상하면서 중얼거리며 나온다.

조르주 심농은 그 문장을 네 번 반복하면서 희열을 느꼈으리라. 좋은 이야기를 썼음을 온몸으로 느꼈으리라. 정말 글 잘 쓰는 인간이다.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라.

미스터리도 훌륭하지만 여기에 연민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무려 네 번이나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감동의 망치질을 해대는, 작가의 자신감이라니! 걸작이다.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는 매그레 시리즈가 읽고나면 재미있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오락용 추리소설을 넘어 왜 문학작품인지 보여준다.

추리소설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답을 아는 상태에서는 궁금증이 없기 때문이다. 답을 알면서도 다시 읽는 이유는 바로 그 궁금증을 어떻게 유발시켰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추리소설 작가는 이미 범인과 범행 수법을 확실하게 안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대한 숨기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 절대로 쉽게 알아낼 수 없게 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그렇게 썼을까? 단순히 읽는 재미만을 얻는 독자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한 번 읽고 말지만, 그 이상의 독자나 작가가 되려면 두 번 이상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간 질환이 있는 남자, 에밀 갈레가 죽었다.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 심장이 꿰뚫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해도 말이 되지 않는 단서들만 나열될 뿐이다. 그러다 후반부에 갑자기 매그레가 이 단서들을 이어맞추면서 죽은 갈레 씨의 인생이 드러난다. 기막힌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넘어 인간다움을 담아낸다.

우물 하나와 객실 하나, 그리고 권총. 알고나면 대단한 트릭일 것도 없다. 

셜록 홈즈의 '토르 교 사건(The Problem of Thor Bridge)'과 비슷하다. '토르 교 사건'을 읽고 감동한 사람은 없어도 '갈레 씨, 홀로 죽다'를 읽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갈레 씨는 최선을 다해 살고자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했다. 불쌍한 남자. 인생 참 안 풀렸던 그였고 아내고 자식이고 별 다른 사랑조차 받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그들을 위해 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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